Tuesday, March 16, 2010

말라기 1장 ~ 4장

말라기 제1장

=====1:1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 여기 "경고"라는 말은, 재앙이나 환난을 가지고 위협하면서 책망하는 말씀을 의미한다.

=====1: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를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 선지자 말라기는, 그 때 유대인 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마땅히 행 하여야 할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그런 행위를 가능케 하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케 한다. 곧,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 하신 것만큼 저들은 그것에 대한 감사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 사실의 확실성을 먼저 변증한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 사랑은, 무엇보다도 저들을 택하신 사랑이다.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은, 그가 야곱을 택하셨다는 뜻이다(창 25:23; 롬 9:10-17). 에서는 야곱의 형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야곱에게 장자의 기업을 주신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선택은 반드시 자연적 질서로 말미암아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참 사랑은, 이렇게 객관적 조건에 영향을 받아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행하는 주체자의 무조건적 결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 "미워하였"다는 말은, 에서를 택하지 않은 결과 그의 지은 죄대로 갚으신 사실을 의미하는 것뿐이다."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 에게 붙였느니라". 에서의 자손으로 되어진 에돔 나라가 황무지가 된 것은, 맨 처음에는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하러 가는 도중에 성취된 것으로 본다(렘 25:9,21).

=====1:4,5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2)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가난하나 (말1:4)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말1:5)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 고한 것은, 에돔의 교만이다. 에돔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힘을 믿어 어디 까지든지 국세를 회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제일 미워하시기 때문에, 에돔이 자신(자기를 믿음)한 바와 정반대로 행하셨다. 곧, 그는 에돔을 무너뜨리셨다.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은 그를 낮추신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밖에 이방 세계에서도 그 위엄을 나타내신다는 의미이다. 곧, 그가 에돔을 멸망시키므로 역시 모든 이방에 대한 그의 주권이 확실히 드러난다.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 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 이 세상 모든 윤리 제도는 하나님께서 내신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도움이 되는 초등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말라기는,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하여 부자 관계와 노주 관계의 도덕에서 추론하여, 하나님에게 대한 제사장들(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의미에서)의 경건을 질문식으로 요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아버지와 같으시니 (신 32:6), 이는 그가이스라엘을 택하신 나라로 창조하시고 또 육성 하신 까닭이다 (사 44:26; 렘 31:9; 시100:3).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주가 되시어 그들을 소유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하나님을 공경하며 또 두려워해야 할 것이었다. "공경"한다 함은, 기도함과 찬송함과감사함과 순종하므로 이루어지고, "두려워함"은, 노예적인 공포가 아니고 도덕적인 공포 곧, 하나님을 거스려 범한 죄 때문에 두려워함이다. 위의 두 가지 요소는, 신앙의중요한 요소들이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 말씀은, 인생들이 언제든지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는 마비된심정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대면 멸시함이 아니고, 무의식으로 무성의하게 되어진 예배 행위이다. 그것은 이 아래 귀절들이 보여준다.

=====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 이니라 - 여기 이른바 "더러운 떡"이라는 것은, 성전 안에 드리는 진설병을 이름이 아니다. 그이유는, 진설병은 제단 위에 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관설된 "떡"은, "나의 단에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델리취(Delitzsch)가 말한 것과 같이 희생 제물의 고기를 이름이다. 고기를 떡이라고 한 말씀은, 레 21:6, 8, 17에도 있다.그런데 이 희생의 고기를 드리되 더러운 것으로 드렸다 함은, 흠 있는 동물의 고기를드렸다는 뜻이다(레 22:20-25). 그들은 이렇게 주님(주님의 제단)을 더럽게 하면서도그렇게 한줄 모르고 그 죄악을 부인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말로써 멸시하지는 않아도, 말보다 무게 있는 행동으로 그리 한다. 그리하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함은, 그마비된 심령의 소위이다. "말함을 인함이니라" 라는 말씀은, 그들이 구설로써 말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 행동으로 무언중에 그렇게 나타냄을 이름이다.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말1:8) - 선지자 말라기는 여기서 위의 7절에 말한 "더러운 떡"- 이 무엇임을 지적한다. 흠있는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다(레 22 :22). 이렇게 희생 제물을 완전한 것으로 드리도록 명령한 것은(레 22 :21), 이것(속죄 제물)이 예수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에서 그 고기를 섭취하심이 아니고, 그 의미(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의미)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흠 있는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은, 제물로서는 가치 없는 것을 바침이다. 제물이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정한대로 순종하여 바침이 되어야 한다.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 이 말씀을 보아도, 선지자 말라기의 교훈은 어디 까지나 실제적이다. 곧,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공경하는 표준을 인간 생활의 실제면에서판정하도록 꾸며진 것이다. 우리의 실생활 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경외의 이면을살필 수 있다는 것이 본서의 일반적 특징이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잘못된 제사가 그에게 가납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실제 사황에서 추론한다. 곧, 총독도 그와 같은, 흠 있는 예물은 받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한 기도는, 대단히 겸손한 기도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보아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겸손한 듯한 기도는 외식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도가 진실하기 전에는 그것을 들어 주시지 않는다.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1:10) - 하나님께서는, 위에 관설된 것과 같은 헛된 제사는 받지 않으신다는 의미에서, 어디까지나 강한 말씀으로 결론하신다.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 본절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될 신약 종교를 예언한 것이다(J. Ridderbos).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장차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이방 민족이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것을 가르친다. 그런데 선지자 말라기가 이 점에 있어서 이런 예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저렇게 하나님께 제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까닭이다. 곧, 오래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백성으로 자처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참되이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을 보는 선지자는, 도리어이방인들 중에서 앞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할 자들이 많이 일어나리라고 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큰 것을 보여 준다. 이런 큰 이름을 그 때의 유대인들은 그 행동면에 있어서 멸시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우매한 짓이다. 이 귀절에 사용된 표현들이 역시 구약식으로 되어 있다. 곧, "분향한" 다던가 "제물"을 드린다는 표현들은, 실제에 있어서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그런 의식 제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영광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한다 (요4:21-24). 이와 같은 예배가 말라기의 이 예언에서 구약식 의식 제사의 표현으로 진술되어 있다.

=====1: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말1:12) - "그 위에 있는 실과"- 라는 말은, 제단 위에 놓은 소산물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 아랫말이 설명하여 주었으니 곧, 식물 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여기서도 희생 제물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1:13) - "번 폐스"- 럽다 함은 번거롭고, 짐이 되고, 피곤함을 의미 한다. 외식하는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을 감심으로 드리지 않고 무거운 짐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억지로 이행한다.
"코 웃음하"- 였다 함은, 그 때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실제 모양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겠으나, 여기서도 역시 그들의 행동이 코 웃음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희생제물을 바침에 있어서 하필 병든 것과, 저는 것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1: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1:14) - 여기 이른바 "떼"- 는 양떼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 바치는 양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수컷을 좋게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제사(무슨 소원이 있어서 이룸 받기를 원하고, 그것이 이루어진 때에는 어떠한 감사를 하겠다는 서약의 제사를 의미한)를 드릴 때에 수컷은 못 드릴망정, 다른 것들도 흠 있는 것을 드렸으니,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행동이다. 여기 이른바 "사기" - 라는 것은, 좋지 못하고, 흠 있는 것을 드리면서 제사를 잘 드린 듯이 취한 태도를 이름이다.


말라기 제 2장

=====2:1,2
<제사장들에 대한 명령>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말2: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 하였음이니라 (말2:2) - 여기 이른바 "이같이 명령하노라"- 고 한 말씀은, 1:6-14에 있는 것과 같이 제사장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 되이 하여야 한다는 명령이다. 이런 명령이 있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순종치도 않으며, 마음에 두지도 않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비는 복을 주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하신다.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라는 말씀은, 그들이 순종치 않은 결과로 벌써 저주받은 일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들이 빈복을 주시지 않고 저주를 받도록 하시는 것은, 앞으로 더욱 심하여 진다는 뜻이 본절에 있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릴 때에도 단번에 다 내리지 않으시고 점차 많이 내리도록 하신다. 그가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그는 자비하셔서 이렇게 시간을 잡아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려는 것이다.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 하였음이니라"- 고 한 말씀은, 그들이 여호와의 꾸짖는 말씀(1:6-14)을 그들의 마음에 간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 여기"종자"라는 말은, 히브리원어로 제라 인데 제로아로 발음하여, 팔(arm)이라고 번역함이 정당하다(Keil an-d Delitzsch). 그렇다면, 팔을 견책한다는 것은, 제사장들의 종교적 활동(팔은 일하는 것이니)을 열매 없이 만들겠다는 뜻이다.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것이라"함은,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제물로 가져온 소나 양의 똥과 같이 그 때에 활동하는 제사장들을 수치스럽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종된 자들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으면, 희생의 똥을 얼굴에 바름과 같은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진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똥을 제거함과 같이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2:4,5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 인줄을 너희가 알리라 (말2:4)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말2:5) -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가 이 때까지 명령(1:6-2:3)하신 목적을 밝힌다. 그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니 곧, "레위와 세운......언약"- 을 보존하시려는 것이다. 레위는 제사장 족인데 특별히 그의 자손 중 아론을 상대로 하고 언약을 맺으셨다(대상6:49). 곧, 그 언약은 하나님 백성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도록 된 것이었다. 이 제사 행위가 참되이 존속하려면, 제사장들이 그 일을 진실되이 하여야 된다. 이 제사 행위는, 그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속죄함을 받게 함에 따라 생명과 평강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약을 가리켜 5절 말씀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고도 한다.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 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 이 말씀 뜻은 이렇다. 곧, 하나님께서 제사장(레위는 제사장족의 명칭임)에게 제사의 직책을 주신 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아론을 위시하여 충성된 제사장은 그대로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2:6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 여기서도 레위를 염두에 두고 말씀한다. 곧, 레위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모든 참된 제사장을 염두에 두고 말씀한다. 참된 제사장의 입에는 진리의 법 곧, 하나님의 율법을 바로 가르치는 것이 있고, 그 생활도 경건하여 불의한 교훈을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제사장들은, 화평과 정직 곧, 하나님 앞에서 평화의 관계와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그 사역을 실행한다. 화평과 순결은 모든 하나님의 종들의 자격이다. 그가 이런 자격을 가지고 사역할 때에는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한다.

=====2:7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 늘 - 본절 초두에 "대저"라는말은, 앞절의 이유를 보여주는 접속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절 말씀에 관련 시켜본절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 수 있다. 곧, 제사장의 입에 진리의 법이 있어야(6절 상반절) 할 이유로서는, 제사장의 입술에 진리 지식이 파수되어야 하겠고, 또 사람들은거기서 율법을 찾아 얻을 수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이라는 말씀은, 그 위에 있는 말씀곧,"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된다는데 대한 이유이다. 사람들이 왜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는가?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사자이기 때문이다.

=====2:8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말2:8) - 본절은,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이 원본적인 제사장의 행동원리(윗절에 말하였음)에서 이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게 만들어 주지 못하고 도리어 율법을 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2:9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 되이 하였으므로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다 함은, 그들이 율법을 해석할 때에나 혹은 시행함에 있어서, 가난한 자에게는 가혹하게 하고 부자에게는 순하게 하는 불공정성을 나타내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고, 제 마음대로 그것을 이렇게도 이용하고 저렇게도 이용한 것이니, 결국 하나님을 멸시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아래 말씀하시기를, 자기도 이런 제사장들을 벌하는 의미에서 그들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9절 하반절).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그대로 순종 하지도 않는 교역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시하시는 일을 당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에게 멸시를 받는다.

=====2: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 하여 우리 각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여기 이른바 "한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속죄함이 되었으니 만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함과 같은 의미의 말씀은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유대인들을 민족적으로 택하여 신정 국가로 만들어 주신 아버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랫말 "한 하나님이 지으신바"라는 뜻은 곧,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신정 국가가 지은 바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 한다 함은,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이 자기들의 아내에게 대하여 반역적으로 행함을 의미한다. 그들이 이방 여자를 취하게 된 것은, 그 본래의 아내에게 대하여 파약한 것이니 그것이 반역이다. "열조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기타 족장들로 더불어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성민에게할 것을 약속하심이다(출 19:5,6, 24:8). 이렇게 성별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 있도록 한 것이니 만큼(신 7:6, 14:2; 렘 2:3; 시 114:2; 스 9:12). 그들은 이방 여자를 취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출 34:16; 신 7:3).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 여자를 취한 경우에는 이방우상을 수입하게 되고 따라서 성민의 자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사람이 이방 여자를 취한 경우에는 열조의 언약 곧, 이스라엘 자손들을 성민으로 세운언약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기서 그런 죄를 책망하신다.

=====2:11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중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 하였으니 - 여기 기록된 "궤사를 행"함, "가증한 일을 행"함, "성결을 욕되게" 함은, 모두 다 같은 내용을 가리키는 표현 들이다. 그것은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함"을 가리킨다. "이방신의 딸"이라는 말은, 다른 신(참 하나님이 아닌)을 섬기는 이방인의 딸을 이름이다.

=====2: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 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 "이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곧, 이방 여자를 취하는 자를 이름이다.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라는 말은, 그 죄악을 능동적으로 선도하는 자와, 또는 피동적으로 그지도에 따르는 자를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그 죄악에 있어서 지도자나 피 지도자를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여기 말씀하시기를, 둘 다 "야곱의 장막" 곧, 이스라엘 국가에서 끊어 버리시겠다고 하신다. "제사를 드리는 자"라는 말은, 이방 여자를 취하는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기 위하여 제사 드리는 자를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불의한 짓을 하고 하나님께 제사나 드려, 그저 이럭 저럭 넘어가려고 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러한 자야말로제사를 죄악의 온상으로 이용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용서하시지 않는다.사 1:13, 61:8; 잠 15:8, 28:9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자도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겠다고 하신다.

=====2: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 여기 이른바 "이런 일도 행하나니"라는 말씀은,"둘째로 이것도 행하나니"라고 자역할 수 있다. 그러면 둘째 죄악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이 설명하여 주는데 곧, 본처로 하여금 눈물겨운 이혼을 당하게 하는 일이다. 그들이 이방 여자를 취 할 뿐 아니고 그 본래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 버림 받음 여자들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 가서 눈물을 뿌리며 호소하게 된다.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 게 하도다."라는 말씀은, 그 버림받은 아내들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 가서 눈물을 많이 흘리므로 제단을 가리 울정도 라는 뜻이다. 그 만큼 유대인들이 남들을 억울하게 하는 고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드리는 제물을 받지도 않겠다고 하신다. 신자가 남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교통이 단절되도록 만드는 큰 죄악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다(마 5:23,24).

=====2: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말2:14)-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또다시 저들의 죄책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이, "어찜이니이까"-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시지 않는 이유를 깨닫지 못한다. 선지자는 그것을 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는 의미에서 "이는"-(그 이유는)이라고 말씀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시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어려서 취한 아내(본처)를 버린 까닭이라고 한다. 그들의 본처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고 취한 아내니, 그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배반하는 죄악이다. 창 31:49,50; 마 19:6; 잠 2:17 참조. 그(아내)에게 "궤사를행"- 함은, 여기서는 이혼한다는 뜻이다.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 "영이 유여하"시다 함은 영이 부족 하지 않고 남아 있음을 이름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성립시킬 영을 얼마든지 창조하시려면 창조하실 수 있었으나, 그는 처음에 일남 일녀를 지어 서로 합하여 하나되게 하셨다 (창2:24; 마 19:4-6). 곧, 그가 일남 일녀를 지으신 목적은, 그들이 단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본문에 "하나"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둘이 합하여 하나된다는 의미에서 하나이라는 뜻이다. 부부가 서로 갈리지 않고 하나됨에 있어서 가장이상적일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합치하는 것이다. 일남 일녀가 한 몸을이루는데 있어서 형식뿐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 화합하여 일치함이 참될수록, 거기서 나는 자손이 경건하다는 의미를 우리 본문이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한몸을 이룸에 있어서 우리 본문은, 외모뿐 아니고 심령 속에 그리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는 의미에서, "네 심령을 삼가 지켜"라고 하였다.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고 한 말씀은, 아내로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맺은언약을 배반하지 말라는 뜻이다.

=====2: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말2:16)-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 라는 말씀의 의미는, 남을 학대하는 죄악을 심하게 범하기 때문에 그 악이 마치 그의 옷을 가리우고 있는 것처럼 그의 전 인격을 그것으로 대표한다는 의미이다. 이혼하는 자는 그렇게 큰 학대를 그 아내에게 행하는 자이다."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고 한 말씀에 대하여는, 15절 하반절에 있는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여라.

=====2:17
<주께서 임하시는 날>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말2:17)-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저희들의 범하는 죄악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여호와를 괴롭게 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리하면서도 그들은 그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지자 말라기는 그들이 여호와를 괴롭게 한 죄가 무엇임을 지적한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오해함이다. 곧, 여호와께서는 행악자를 기뻐하시는 줄로, 오해하는 것과, 또는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지 않는다는 그들의 오해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대한 우리의 오해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받으신다. 사람들도 남에게서 오해를 받을 때에 괴로워하지 않는가?


말라기 제 3장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말3:1) - 여기 이른바, "내 사자"- 라는 말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다. "길을 예비"- 한다 함은, 모든 사람들의 심령에 그리스도를 믿을 준비로서 회개케 할 운동이다. "너희의 구하는바 주"- 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가 "홀연히 임한"- 다 함은,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는 때에 곧, 메시야를 대망할줄 모르고 있던 때에 그의 오심은 뜻밖의 일과 같이 되어짐을 의미한다. "그 전에 임"- 한다 함은, 그의 사역이 영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의 사역과 같을 것을 이름이다. "언약의 사자"- 라는 뜻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구원 언약을 성취하시는 중보자를 가리킨다.

=====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재물과 같을 것이라 -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이 말씀 뜻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의 인간 그대로는 초림하신 그리스도 앞에도 설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별 수 없이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 시 130:4 참조. 그리스도는 죄악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시는 이가 아니고, 하나님 아들의 권위를 가지시고 사람들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으므로,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의 주시는 구원에 참예할 수 없으니, 멸망할 것 밖에 없다. 그의 회개 운동에 대하여 우리 본문은 비유적으로 말하기를,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재물과 같을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정화 운동은, 그의 재림 심판 때에 완전함을 이루나니 선지자 말라기는 그것까지 생각하였을 것이다.

=====3:3,4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말3:3)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말3:4)- 여기 이른바 "레위 자손"- 은 제사장들을 이름인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일반 신자들을 총칭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을 깨끗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 그것은, 물론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으시므로 말미암은 속죄와 및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시키는 운동을 통하여 되어진다. 이 성화 운동에 있어서 "연단"- (환난을 통하여 되어지는것)은, 그 중요한 방편이다. 이렇게 성화되어가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참되이 섬길 수 있다.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린"- 다는 것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여호와께 기쁨이 된"- 다는 것은,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김에 대하여 말해주는 구약식 표현이다.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 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 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속히 증거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 하였느니라 - 이 말씀도 계속하여 유대 민족의 정화 운동에 대하여 진술한다. 이 정화 운동은 위에 말한 것(3절)과 같이 제사장에게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도 임한다. 곧, 모세의 율법을 기탄없이 범하는 자들에게 임하여 의와 불의를 갈라놓는다. 물론 이것이, 그리스도의 초림시에는 영적으로 숨기워서 되어지고, 그의 재림시에는 구체적으로 되어진다. 이러한 분변은 있을지언정 둘 다 심판인 것은 명백하다. "술수하는 자"는거짓된 종교적 수단에 의하여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도록 만드는 자이다. 레 20:6참조.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 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함은, 제 7계, 제 9계, 제 8계의 위반을 염두에 두었다.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함은, 무자비한 지시니 제 6계의 위반이다. "과부, 고아, 나그네" (이것은 외국 사람을 의미한). 이 셋은 성경에서 흔히 함께 다닌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다 긍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라는 말씀은, 이 부분에 기록된 죄악의 목록에 있어서 최후의 자리를 점령 하였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것이 모든 죄악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모든 죄악의 근본을 이렇게 말미에 두는 것은, 도리어 그것을 중요한 죄라고 역설하려는 까닭이다. "속히 증거"한다 함은, 부패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그 암매한 자들에게는 돌연히 나타나심 같이 생각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된다.

=====3: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 - 이것은 윗 말씀의 결론으로 나온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그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하신 것을 변하지 아니하시고 필경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보내시어,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정화 운동의 심판에 의하여 택한 백성(야곱의 자손)을 구원 하시고야 만다는 것이다. 여기 이른바 "야곱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 민족 중에 있었던 교회를 가리키나, 거기에 연속된 새 이스라엘 곧, 이방인 교회도 가리킨다.

=====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 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 여기서는 또 다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불회개를 통탄히 여기신다. 저들의 범죄 생활의 역사는 오래였고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것이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은, 회개의 은혜로운 성격을 보여준다(1:3). 사람이 회개할 마음을 진실히 먹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진실되이 단행하면, 그 하기 어려운 회개를 하나님이 성립시켜 주신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무한히 먼 거리를 가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 해결은, 회개하는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하나님에게 있다.곧, 하나님께서 그 회개자에게로 돌아오시겠다고 하시니, 먼 거리도 문제가 아니다.그러므로 회개는 복음적 은혜이다. 이렇게 복음적 은혜인 회개를 유대인들에게 요구 하였으나 저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못하였다. 곧, 무슨 죄를 회개하라는가? 하는 의미에서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고 하였다.

=====3:8,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더러 그 소산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신 것은, 실상 은혜 이다.그 소산을 주신 이가 여호아시니 그것을 그가 전부 요구 하셔도 합당하다. 그러나 그리하시지 않고 다만 십분지 일을 드리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레위 족속의사용할 것을 공급하시기 위하여 요구하셨으니 곧, 곡식, 술, 기름 양떼와 소떼의 처음난것 등에 대한 십일조이다(레 27:30; 민 18:20-24; 신 14:22).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그것을 바치지 않는 자는, 특별히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과 같은 죄이다.

=====3:10-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1)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먹는 자를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여기 "창고"- 라고 한 것은 성전 창고를 이름이다(느 10:38, 13:12; 대하 31:11)."나를 시험하여" - 라는 말씀은, 그가 확실히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풍성한 물질로 갚아주실 것을 보장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이야 말로 도전적인 말씀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들을 보면,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풍성한 물질로 갚아 주실것을 여러가지로 진술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는 대로 십일조를 바치는 자들 중에 확실히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갚아주시는 풍성한 물질을 받은 자들이 있는 반면에, 또 그렇지 못한 일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자세히 알아보아야 된다. (1) 십일조를 바치되 물질의 풍성한 것으로 갚음 받지 못하는 원인은, 아직도 그 바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성실되지 못한 까닭이겠고, 그렇지 않으면, (2) 그가 십일조는 바치지만 다른 죄악 때문에 물질적 축복을 못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겠다고 하셨다(단 9:4).

=====3:13-15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 이 부분 말씀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을 지적한다. 저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여기서도 그 죄악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줄 모르는 것이 그 답답한 형편이다.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에 있어서 그 특징은, 이와 같이 답답한 것을 여러 번 지적하여 말한 점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다른 것이 아니고, (1)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슴게 행하는 것(죄 때문에 금식하는 것과 같은 것)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종하는 자에게 그가 갚아주시는 일이 없다는 패역한 주장이다. (2)그들은 주장하기를, 교만한 자가 복을 받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그들이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가 보자하며 의심함)가 화를 면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반대 하는 사상이다. 신자들이 말로는 이런 악 사상을 발표하지 않아도, 그 마음속에 이런 악 사상을 품을 위험성이 있으며, 그 행동면에 있어서 자기들도 모르는 가운데 이런 악 사상을 행위로 그려 놓는 일이 있을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이런 위험을 경계하고 언제나 사언 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려야 한다.

=====3:16-18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우리는 위의 13-15절에서 하나님을 대적 하는 자들의 그릇된 주장을 보았다. 거기에 반대 되는 진실한 신자들의 주장을, 선지자 말라기가 여기에 소개한다. 이들의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다만 "피차에 말하매"- 라고만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담화 내용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14,15절)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상선벌악 하신다 (18절)는 담화일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담화를 들으시고 그것을 "기념책"에 기록 하셨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기록하신 목적은, 그들이 믿는대로 장차 갚아주시려는 것이다. "돌아와서" -라는 말은, "또 한번"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또 한번 깨달을 것은,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사실이다.


말라기 제 4장

=====4:1
<여호와께서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 여기 이른바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시의 심판을 생각케 하는 것을 전연 제외하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의 초림 시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5절에 그리스도의 초림 시대 곧, 신약 시대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 귀절에 선지자 엘리야(세례 요한)가 그 전(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오리라고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오신 시대 곧, 신약 시대를"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한 것이 명백하다.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을 전개시키는 신약 시대는, 은혜로 사람들을 부르는 시대인데 그 시대를 어떻게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 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신약 시대를 두려운 날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한 두 가지 방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눅 2:34).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고후 2:16).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는 자는 영생을얻으나, 그것을 받지 않는 교만한 자는 멸망을 당한다. 그러므로 이 멸망당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신약 시대도 "극렬한 풀무 불같은 날"이다. 이 때에 교만하여 복음을 받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와 같이 불타서 망하듯이 멸망을 당한다.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라는 말은, 신약 시대의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구약에서 신앙을 경외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보통이다.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가리킨다(눅 1:78). 시 84:11; 60:19 참조. 태양이 만물을 살리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구원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본문은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을 가리켜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하였다. "치료"라는 말은 구원을 가리킨다(겔47:12).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는 말씀은, 신자들이 구원의 즐거움으로인 하여 극도로 기뻐할 것을 비유한다.

=====4: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악인을 밟"- 는다 함은, 구원 얻은 하나님 백성의 최후적 승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물론 회개하는 시대 (그리스도 재림 이전 시대)에 완전히 실현될 일은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친히 악도들을 멸망시키실 때에 완전히 실현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이 승리에 참여하게 된다. 물론 이 승리가 복음 운동 시대(곧, 신약)에도 겨자씨와 같은 종자로 존재한 것만은 사실이다.

=====4: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 여기서는 선지자 말라기가, 유대인 들더러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한다. 그가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그 시대가 심히 부패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를 내다보는 그는,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로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이 필요한 줄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에 세례 요한(여기서는 엘리야라 함. 5절 하반절)이 오신 목적도 이것을 위한 것이다. 이아래 5,6절이 그 뜻이다.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이라는 말은, 신약 시대를 가리킨다. 1절 해석 참조."선지 엘리야"- 는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는 이유는, 양자의 사역 성격이 유사하기 때문이다(눅 1:17).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함은, 그 때에 유대 사회가 타락하여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그런 도덕적 타락을 개척하겠다는 뜻이다. 도덕적 개혁이 진정한 종교를 발생시킬 수는 없으나, 진정한 종교가 나타날 때에 그것을 영접할만한 준비는 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은 도덕적 개혁을 힘쓴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려는 것이다(눅 3:4-6).

Monday, February 15, 2010

빌립보서 3장 1절~ 11절(진정한구원의 길) 12절~21절(목표를 향한 달음질)

진정한 구원의 길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 '종말로'(* , 토 로이폰)는 대부분 '결론적으로', '마지막으로'로 번역되었다(KJV, JB, NIV, RSV). 그러나 이 단어가 서신서에서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경우는 극히 드물며(고후13:11), 오히려 새로운 주제를 소개하려고 할 때(살전 4:1;살후 3:1)많이 사용되었다.그러므로 본절의 '종말로'는 바울이 끝을 맺기 위해 사용했다기 보다는 새로운 주제를소개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이제는', '더 나아가서', '덧붙여서'라고 번역하는 것이타당하다(Goodspeed, Knox, Houlden, Moffatt). 한편 바울은 본 서신의 여러 곳에서'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다(1:18;4:4,10).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옥중에 있을 때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뻐하라'고 한 것은 기뻐함을 통해서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일치를 해소(解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는 성도들의 이러한 기쁨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가능한 것임을 시사한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같은 말'에 대한 해석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주 안에서 기뻐하라'를 가리킨다(Alford, Weiss, Moffatt). (2) 3,4장에서 언급된 교회내의 불일치에 대한 경고를 가리킨다(Lightfoot).(3)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이다(Zahn, Meyer, Scott, Vincent).이 세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1)은 문맥상 다음에 이어지는'너희에게 안전 하느니라'와 연결되어지지 않으며 (2)도 2절 이하에 기록된 거짓 교사의 경고와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복음에서 벗어난 사실들을 지적해주는 것이 아무리 지나치다고 할지라도 지루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3:2
본절은 유대주의를 따르고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유대주의를 강요하는 자들에 대해조심 하라는 권면이다.
개들을 삼가고 - '개들'은 길거리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덤벼드는 사나운 짐승을 가리키는 것으로(Lightfoot) 경멸스러운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했던 상징적 표현이다(신 23:18;삼상 17:43;잠 26:11;사 56:10,11). 예수께서도 이 말을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에게 사용하셨고(마 7:6) 이방인을 가리킬 때도 사용하셨다(마 15:26,27). 본문에서의 '개들'은 성도들을 괴롭히는 유대주의 행악자들을 지칭한다(Michael).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 '행악하는 자들'은 문자적으로 '악한 일꾼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고 율법을 행함 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이다.
손할례당을 삼가라 - '손할례당'의 헬라어 '텐 카타토멘'(* )은 문자적으로 '절단한자'를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인간적 노력의 산물인 의식적인 행위만 중요시하는 자로서 율법을 고수하였다.

=====3:3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 본절은 2절에서 경고한 내용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율법에 따른 행위만을 일삼는 유대주의자들은 진정한 할례당이 아니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이 진정한 할례당이다(롬 2:25-29;골 2:11). 바울은 진정한 할례당의 특징을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여 - '봉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트류온테스'(* )는 유대인들이 공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한 말이다(눅 2:37;행26:7;롬 9:4,TDNT). 진정한 할례당은 전통이나 형식에 지배받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시 51:17).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참할례당은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자들로서 모든 만족과 소망이 그리스도를통해서 나오는 것임을 아는 자들이다(갈 6:14).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 '육체' 에 해당하는 헬라어 '사르키'(* )는일반적으로 몸(눅 24:39), 인간의 성품(요 1:14), 타락한 본성(롬 7:5) 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Schweitzer, Muller). 본절의 '사르키'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것즉 인간의 의식(儀式)이나 공적 등을 가리킨다. 본절은 진정한 할례당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의(義)를 얻을 수 없는 의식과 자랑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함을 시사한다(Kent, Martin).

=====3:4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 사도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자신의 간증을 하고 있다. 그는 성령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육체를 자랑할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다. 바울이 육체를 자랑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육체를신뢰할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만이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확실한 진리이며, 그 어떤 것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Ridderbos).

=====3:5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육체를 신뢰할 만한 근거들을 제시한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으며(창 17:12;레 12:3),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는 성인이 되어서 할례를 받았다(행 16:3). 바울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난 지 십삼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이스마엘 족속과도 달랐다. 그는오로지 율법에 정한대로 난 지 팔 일만에 부모로부터 할례받은 진정한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얻은 선택된 언약의 백성임을 의미하며 '족속'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민족으로 하나님과 약속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거룩한 백성의 개념을 가지고있다(Lightfoot). 바울은 이방인에서 개종한 사람이 아니라 순수한 이스라엘태생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권리와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Hawthorne).
베냐민의 지파요 - 베냐민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아들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이 이지파였다(삼상 9:1,2). 하만의 음모(陰謀)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베냐민 지파였다. 또한 베냐민 지파는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다윗 왕조에 신실하게 충성하였으며 바벨론 포로때에는 성전 건축을 위해 유다와 레위 지파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느 11:7-9). 바울은 이런베냐민 지파에 속한 것을 매우 자랑하였으며(롬 11:1) 이 자랑을 통해서 자신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 순수한 유대인임을 밝히고있다(Hendriksen, Kent).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 본절은 바울 자신이 '아브라함의 씨'로서 이방인의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히브리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히브리인임을 밝히고 있다(Kent,Hawthorne). 그는 유대인 방식으로, 히브리말로써 양육을 받은 자였다(행 22:2,3, Mu-ller).그러므로 그는 혈통은 물론 히브리말과 히브리 관습을 그대로 보존한 순수한 히브리인이 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바리새파는 가장 엄격한 유대 종파로서 구약의 율법은물론 구전이나 서기관이 해석한 전승을 연구하며 따르는 자들이다(Hawthorne,Muller).바울은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나(행 23:6) 바리새파에 입문한 자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존경받는 선생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했다(행 22:3). 그러므로 그는 바리새인중에서 가장 신실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였다(Beare).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 다메섹 도상에서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바리새인으로서 예루살렘성 밖에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자였다(행 9:13,21).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었다. 한편 '율법의 의'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명령들과 기준들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의'를 의미한다. 바울은 이런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다른 사람이 볼 때 흠이 없었던 자였다. 그러나 바울이 지킨것은 율법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진정으로 요구하시는 영적 순종에는 미치지 못하였다(Kent).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 '무엇이든지'는 단지 앞의 구절(5, 6절)에서 언급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앞절들(5,6절)에서 언급한 바울이 신뢰할 만한 육체의 조건들은 다만 대표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본절의 '무엇이든지'는 바울 자신에게 이익이 되었던 모든 것을 가리킨다(Vincent, Kent). 바울은 유대교에서 자신의 외적인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었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부터 이전의 자랑거리가 이제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되고 말았다. 구원이 단지 예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과거에 구원을 얻을 조건이 되리라 생각했던 외적인 조건들이 해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길 뿐더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게마이'(* )는 완료 중간태로서 해로 여겼을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해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다.

=====3:8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 앞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헤구마이(* , '해로여김')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자신이 해로 여기고 있는 확신이 지속되고 있는것을 나타내며(Kent) '모든것'은 7절의 유익했던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것을 의미한다(Martin, Bonnard, Dibelius).'가장 고상함'의 헬라어 '휘페레콘'은 '탁월함'이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바울 자신이 가장 뛰어난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음을 의미한다. 한편 '내 주'는 그리스도와 바울 자신과의 친밀한 관계를나타낸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내가그를 위하여'라 함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위하여 지금까지 그가 귀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여기서모든 것을 잃어버린 때는 그의 회심의 때를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배설물'의 헬라어 '스퀴발라'(* )는 개에게 던지는것으로 '똥'이나 '음식 찌꺼기' 또는 '쓰레기'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후 그 이전의 삶 전체에 대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버렸는가를 시사한다(Hawtho-rn, Martin).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본절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재림의 날에 구원얻는 것을 나타낸다(Kent, Martin). '발견되리'는 앞절의 '그리스도를 얻고'와 동등하게 '히나'(* ,'...하기 위하여')에 연결된 목적절로서 '바울 사도가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이 발견되려'라는 의미이다(Vincent, Hawthorne).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긴밀한 연합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의를 힘입고 있음을 시사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 '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넨'(* )은 법정에서 사용된 용어로 두 부류 가운데서 한 쪽은 '옳다'고 인정하고 다른 한 쪽은 '정죄'할 때 사용되었다(Hawthorne).그러므로 본절은 믿음을 통하여 '의'를 얻으며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지 못한다는 의미로, 바울 자신이갖고 있는 의가 자신의 노력이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의해서 온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하나님께부터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은 오로지 십자가에서 죄를 속량하신 그리스도를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유일한 조건인 '믿음'은 '행위'와 반대되는 것으로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로는 '의'를 얻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Kent).

=====3:10
내가 그리스도와...알려 하여 - 8절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Kent).여기서 '알려하여'의 헬라어 '그노나이'(* )는지적지식 뿐 아니라 경험적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과거나 현재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알기를 원한다는 강한 의지를 시사한다.
그 부활의 권능 -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알기를 원했던 것 '그 부활의 권능'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이나 그리스도인이 죽음 이후 경험하게될 육체적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Muller) 부활하셔서 믿는 자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낸다. 이 부활의 권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살도록 한다(롬 6:4). 바울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서만 알기를 원치 않았다.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그의 개인적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했다(Hawthorne).
그 고난에 참예함 - 본문은 '부활의 권능'과 분리된 전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같은 경험의 또 다른 측면이다(Hawthorne). 이것 역시 단순히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내외적인 고난을 말하는 것으로(Kent),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골 1:24).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롬 8:17-18;고후 4:7-11).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본문은 앞서 언급한 '그 고난에 참예함'을 보다 직접적이고 심도있게 표현한 것이다(Muller). 이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에 참예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신의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고(롬 6:5,6;고전 15:31;갈 2:20), 그리스도의 새로운 부활의 생명으로 연합(聯合)하여 계속 성장해야 함을 시사한다(Kent).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어찌하든지...이르려 하노니'의 헬라어 '에이 포스 카탄테소'(* )는 부활에 대해다소 의심을 내포하는 듯하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바울이 부활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아니라 부활의 방법에 대해 의심한다고 주장한다(Lenski). 그러나 오히려 이것은 그의 깊은 겸손과 조심스런 바람의 표현으로서 자기 신념을 배제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L-ightfoot, Kent, Hawthorne, Hendriksen, Muller). 한편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엑사 나스타신 텐 에크 네크론'(* )은 신약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주 드문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의인과 죄인 모두의 부활을 나타낼 때는 '아나스타시스 톤 네크론'(* )을 사용한다. 이러한 일반적 표현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전치사 '에크'(* ,...로 부터')가 두번씩이나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 의인의 부활혹은 영광의 부활을 뜻하는 부분적인 부활로 보아야 한다(Kent, Muller, Hawtherne).즉 본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예하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같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될 영광의 부활을 시사한다(계 20:4-15).


목표를 향한 달음질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 본절은 바울이 이미 도달한 현재의 상태와 앞으로 도달하여야 할 목표 사이의 갈등을 나타낸다(Martin).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났던 것을 암시한다(Muller). 그는 그곳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다. 그의회심은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서(Robertson) 그가 열망하는 완전함에 이르기 위하여 믿음의 경주 즉 영적 성장을 향해 계속해서 달음질해야 한다. 여기서 '좇아가노라'로 번역된 헬라어 '디오코'(* )는 '추적한다'라는 의미로 사냥이나 달리기 경주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본절에서 '디오코'는 좀더 적극적이고 열심히 노력하는 강한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배우고 닮아가고자 하는 바울의 진지한 노력을 시사한다.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목적을 계속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자각시키고 있다.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본절은 앞절의 반복이다. 바울이 자신의 과거에 집착(執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나아감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빌립보 교인들 가운데 행위와 의식을 강조하며 자신들이받은 영적 은혜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극단적 완전주의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인 듯하다(Kent). 본문의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는 바울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일관된 삶의 자세를 나타낸다. 여기서 '잊어버리고'의 헬라어 '에필란다노메노스'(* )는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관심을 빼앗아 진보를 방해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에필란다노메노스'를 통해서전에 지녔던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루어 놓은 업적들로 인해서믿음의 경주를 방해받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앞에 있는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목적을 잡기위하여 전력을 다해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고 있다(Martin).

=====3:14
푯대를 향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스코폰'(* )은 문자적으로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라는 의미이다. 이는 경주자가 달려가고 있는 경주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바울이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히12:1,2)만을 바라보고 경주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삶의 여정 속에서 자신들의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고 그를 향하여 전진하여야 함을 시사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위에서 부르신 부름'은 경주의 승리자에게 상을 주기 위해 심판관 앞에있는 높은 단으로 올라오도록 명하는 것에서 연유된 표현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부르심을 의미하며(고전 1:26;7:20;엡 1:18;4:1,4;살후 1:11) '상'은 경주 뒤에 있을 영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시사한다.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 '온전히'의 헬라어 '텔레이오이'(* )는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치 않은 절대적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연약과 무지에 비하여 꽤 성장한 상대적 완전으로서 더 높은 목표를 향한 노력의 여지가 아직도 남아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전 2:6;14:20;엡4:13;골 1:28;4:12, NIV, KJV, Kent, Vincent).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소속되었고 하나님께로 구별되어서 '온전히 이룬 자'가 되었으나 아직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分量)까지 성숙해가야 한다(Muller).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바울은 자신이 생각하는 '온전'에 대해 혹시나 빌립보 교인들 중에 반대가 있거나 다른 생각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리라고 확신한다(Martin, Kent).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동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라도 그 성숙의 정도가 서로 차이가있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 영적 성장을 이루어가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히 6:11,12). '그대로 행할 것이라'의 헬라어 '토 아우토 스토이케인'(* ) 중 동사 '스토이케인'은 '보조를 마추라', '일치하여 행하라'는의미를 가지고 있다(갈 6:16). 바울은 '스토이케인'을 사용해서 다시 한번 성도들 상호간에 성숙과 의견의 차이가 존개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와 협력을 이루어 나갈것을 일깨우고 있다(Hawthorne, Kent).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이(고전11:1) 빌립보 교인들이 따라야 할 모델로서 자신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의 이와같은 권면은 자기를 자랑하는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Kent).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의 헌신에 대하여 모델을 통한 실제적인 교훈이 필요하였고, 바울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구체적인 모델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하고있다(7-16절;고전 11:1, Hendriksen).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만을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암시한다(2:25,29,Muller, Hendriksen).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은 물론 다른 동역자들의 삶을 빌립보 교인들이 배우기를 권면한다.

=====3:18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고 율법의 규범을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로서 2절에 언급된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enski, Muller, Barth, Hawthorne). (2) 혹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왜곡하여 율법의 모든 금지 조항을 부정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ightfoot, Kennedy, Beare).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죄를 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왜곡(歪曲)하여 참자유가 아닌 방종을 일삼는 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Kent).

=====3:19
본절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 대한 설명이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 '멸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레이아'(* )는 '구원' (* , 소테리아)의 반대 개념이다. 이는 특별히 사악한 자들에 대한 형벌로서 영원한 파멸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마 7:13;벧후 3:7;계 17:8).'십자가의 원수'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될수 없으며 육신의 욕망에 빠져 있기에 영원한형벌을 받게 된다.
저희의 신은 배요 - 본문은 쾌락주의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Muller, Kent), 육체의 정욕대로 사는 것을 시사한다(롬 16:18;고전 6:13;유 1:11).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 '부끄러움'의 헬라어 '아이스퀴네'(* )는 '벌거벗음'(nakedness), 또는 '사람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킬때 사용되는단어이다(Hawthorne). 따라서 본문은 '저희'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부도덕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즐겼음을 시사한다(엡 5:12).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 -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일'에 관심을 두는 반면(20절, 요3:12)이들은 '땅의 일' 즉 본능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세상적 가치 기준을따라 행동한다(Muller, Kent).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 본절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된 자들과반대되는 참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나타낸다. 빌립보 시민들이 비록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로마 제국에 속해 있어서 로마의 시민으로서 특권을 누리는 것처럼 빌립보 교인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히 11:13;벧전 2:11)처럼 산다할지라도 하늘에 소속된 시민이다(Martin, Kent, Calvin).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비록 지금은 지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므로 하늘나라 시민 으로서 합당한 모든 책임과 의무를 기뻐하여야 함을 권면한다(Hawthorne).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 '거기로서'가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혹자는 '시민권'(Martin), 혹자는 '하늘'(Muller, Moffatt)이라고 주장하나, 두 가지를 모두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Kent).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연고지가 하늘이기 때문에 모든 관심사가 하늘에 있으며 진정한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롬 8:21-23). 왜냐하면 그의 재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는 온전한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Muller).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임할 온전한 구원의 모습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 그리스도인의 몸은 '낮은 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으로 완전히 변화된다.여기서 '낮은 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갖고 있는 현재의 몸으로서 죄짓기 쉬운 욕망, 죽음, 질병, 고난등에 대해 무방비한 상태로 놓여 있는 육체의 연약성을 시사한다(Kent).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현재의 썩어질 몸을, 당신이 부활하실실 때 입으신 '영광의 몸' 즉 '썩지 아니할 몸', '신령한 몸' 으로(고전 15:42-44) 변화시키실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 곧 '그리스도'의 역사로 이루어진다.'역사'(役事) 의 헬라어 '에네르게이안'(* )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리킨다(Muller, Kent). 그리스도는 온 우주와 원수들,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초자연적이며 주권적인 능력을 가지시기에 마지막날 성도들을완전히 구원하실 것이다.

Thursday, February 4, 2010

요한일서 4장 1절~6절(성령과악령)7절~21절(하나님은 사랑이시다)

====4:1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저자 요한이 진술하고자 하는 주체로 수신자들의 관심을 전환시키기 위한 호칭이다. 요한은 본절 외에도 이와 같은 표현을 본장에서 두 번 더 사용하여 수신자들의 관심을 야기시키고 있다(7,11절, Brooke).
영을 다 믿지말고. - '믿지 말고'의 헬라어 '메...피스듀에테'(* )는 '진실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말라'라는 의미이다. 이는 '시험하라'와 연결되어 모든 영을 대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잘 분별하여 받아들여야 함을 시사한다.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 '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타'(* )는 복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나 악한 자의 영이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에 언급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가리킨다(Marshall). 한편 '시험하라'는 기준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을 가리킨다(Stott).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바울에 따르면 영들을 시험하여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특별한 은사이다(고전12:10).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하는 분별력을 가리킨다(Westcott). 요한은 당시 수신자들 사이에 스스로 영감을 받았다고 자장하던 이단자들을 염두에 두고 수신자들이 이들을 시험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함으로 무조건 따르지 말것을 권면하고 있다.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 본문은 수신자들이 영들을 시험해야 할 이유이다. '거짓 선지자'는 신약성경에서 '진실한 선지자'를 대적하는 자나(눅6:26; 벧후2:1), 혹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도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마7:15; 24:11,24; 행13:6).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은 종말론적 현상이다(2:18; 막13:22, Barker).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그리스도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이나 교리로 미혹하는 자들로서(마24:11; 살후2:3; 계20:10)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유혹한다.
====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 '하나님의 영'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13절; 3:24, Stott).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증거 하심을 의미한다. (2)혹자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JB, Smalley). 이들은 본절이 앞절과 연관되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나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나은 듯하다. 한편 '알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스케테'(* )에 대해서 혹자는 명령법으로 해석하나(Law), 본서 어디에서도 명령법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Westcott, Smalley, Brooke). 요한은 본문네서 수신자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신자들이 알고 경험했던 영적인 사실들을 잘 지키며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상기시키고 있다(13절; 3:16; 5:2)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본문은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거짓 영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의 인정 여부이다. 요한 당시 수신자들 가운데에는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에 빠져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공동서신 개론의 "공동서신의 이단 사상" 참조). 요한은 본절에서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를 공격하고 있다. 한편 '오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렐뤼도타'(* )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요이1:7에서 현재 시상으로 사용된 것과 대조를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이 영원한 사실이며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시사한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다(1:1,2; 3:1; 5:1; 요1:12-14, Westcott).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한다. 즉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이셨다(Marshall, Smalley).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 비록 '육체로 오신'이 생략되어 있다 할지라도 본문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반대로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고 거짓 영에게 지배를 당하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참된 성령의 도움으로 성육신을 시인하는 것과 거짓 영의 지배를 받아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절대로 중간 지대란 있을 수 없다(Law). 오직 양극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토 투 안티크리스투'(* )는 헬라어 어순상 앞절의 '토 프뉴마 투 데우'(* , '하나님의 영')와 대조를 이루어 '프뉴마'(* , '영')가 생략되어 있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토 투 안티크리스투'가 거짓 영을 의미하나(Law) 문맥상 본문은 거짓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들, 즉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세상에 오심을 부인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은 사단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 '이제 벌써'는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들이 종말에 출현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했고(2:18) '이제 벌써'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함을 밝힘으로 종말의 긴박성을 암시하고 있다(Smalley). 한편 '세상에'는 1-6절 사이에 무려 6번이나 나타나며 모두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세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며 통제하는 곳으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지칭한다.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 요한은 본문에서 다시 '자녀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수신자들이 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그들을 이기었음을 확신시키고 있다. '하나님께 속하였고'는 수신자들이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세상과 연합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기었나니'의 헬라어 '네니케카테'(* )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승리가 과거에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효과가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Houlden). 이 승리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리가 거짓임이 판명되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본서에서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승리는 지식적인 면에서 거짓된 교리에 대한 분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통해서 거짓된 교리를 정복하고 있음을 시사한다(Smalley).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된 교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수신자들이 세상을 이긴 이유이다. '너희 안에 계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엔 휘민'(* )에서 '이'를 의미하는 '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3:20, Haas). (2)혹자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2:14; 3:24; 요14:20,23, Westcott). (3)혹자는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6절; 2:20,27; 요14:16,17; 16:13-15, Stott, Houlden). 이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가운데 역사하셔서 사단의 영향력 하에서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게 되며 그 결과로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있는 이'는 사단이나 악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2:13,14; 3:12; 5:18,19) 그는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아니하고 세상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며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오직 세상에 속한 자들에 한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그 세력을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단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루셨으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그 승리에 동참하기 때문이다(6절; 요16:33; 롬8:31, Stott, Calvin).

====4:5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 '저희'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훈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킨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속한 고로'의 헬라어 '에크 투 코스무'(* )에서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서 비롯되었으며 세상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임을 시사한다. 또한 '세상'을 지칭하는 '코스무'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복음과 반대되는 사상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주장하던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상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2)그러한 사상에 미혹된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치되는 당시 사상에 탐닉했고 그것에 빠져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려 했다.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 요한은 4절까지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수신자들만을 지칭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에 대해 혹자는 사도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Brooke)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Haas, Schnackenburg). 왜냐하면 이미 수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4절).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 '우리의 말을 듣고'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콘'(* )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친 거짓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지식을 가리킨다. 더욱이 본절의 '아는'은 현재 시상으로 그 지식이 지속적이며 성장하는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우리의 말'은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 즉 처음부터 있었던 말씀을 가리킨다(2:7, 24; 3:11; 요이1:5,9).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부인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마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진리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요14:17; 15:26; 16:13, Marshall, Stott). (2)혹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Dodd, Haas).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 진술해 온 것으로 보아 후자가 보다 적합한 듯하다. 한편 '미혹의 영'은 '진리의 영'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이것 역시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단의 지배 하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 복음을 청송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 '사랑하는 자들아'는 본서에서 6번 나타난다(1,11절; 2:7; 3:2,21). 이 호칭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도로서 수신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서로 사랑해야 함을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사랑하자'의 헬라어 '아가포멘'(* )은 현재 시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의 요구임을 시사한다. 이 명령은 예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3:11; 요13:14-17,35).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 본문은 다음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와 연결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근거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는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의 근원으로서 그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셨다(Westcott, Marshall, Barker).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 )는 사랑하라는 명령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혹자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나(Bultmann) 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Schnackenburg, Smalley). 한편 이러한 사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행위를 내포한다(3:18).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녀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낸다(Law). 곧 행위를 동반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내는 기준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메 아가폰'(* )에는 앞절의 '사랑하는 자마다'(* , 파스 호 아가폰)에 삽입되어 있는 '파스'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파스'가 생략된 것은 본절의 사랑이 개인적인 권면을 가리키는 앞 절과는 달리 일반적인 의미임을 암시한다(Smalley). 한편 '알지'의 헬라어 '에그노'(* )는 부정 과거로 현재 시상을 사용한 앞절의 '기노스케이'(* , '알고')와 대조를 이룬다. '기노스케이'가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본절의 '에그노'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을 전혀 알거나 경험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Marshall). 사랑하는 자가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자는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앞절과의 대조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본문은 7절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보다 더 발전된 표현이다. 요한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랑의 근원이심을 밝힌데 이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선언한다. 즉 이것은 사랑이 하나님의 모든 행위들 중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사랑임을 시사한다. 요한은 본서에서 사랑을 언급할 때 행위와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한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나 사실상 그들의 삶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사랑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 '우리에게'로 번역된 헬라어 '엔 헤민'(* )에 대한 해석은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 사이에'(among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Stott). (2)혹자는 '우리 안에'(in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Westcott). (3)혹자는 '우리게게'(to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4)혹자는 '우리를 위하여'(for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Barker). 한편 '나타난 바 되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네로데'(* )는 '파네로오'(* , '나타내다')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요한은 '파네로오'를 예수의 사역(1:2; 3:5,8),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심(요21:1,14), 그리고 예수의 강림(2:28)에 사용하고 있다. 본절에서 사용된 부정 과거 '네파네로데'는 명확한 역사적 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음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성육신을 가리킨다(Law, Smalley). 요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현시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 '독생자'의 헬라어 '모노게네'(* )는 히브리어 '야히드'(* )를 번역한 것이다. '야히드'는 70인역에서 두 가지로 번역된다. (1)'사랑하는'(beloved)을 의미한다. (2)'유일한'(uni- que)을 의미한다. 본절에서의 '모노게네'도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들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보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스탈켄'(* )은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사건이 지속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사랑을 증거하신다.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 본문은 '히나'(* , '위하여')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나타낸다. '살리려 하심이라'는 인간이 전에 '죽은 상태'임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시고 이루심으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하셨다(3:14).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 '여기 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 에스틴'(* )은 앞서 기술된 내용, 즉 9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3:16). 한편 '우리가...사랑한 것'(* , 에가페카멘)는 부정 과거 시상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는 시상의 변화가 있다. '에가페카멘'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결코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에가페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적인 특별한 사건에 의해서 나타났음을 시사하는데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9절). 요한은 이러한 시상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사랑이 지속적이지 않아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Law, Smalley). 반면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되어 사랑의 궁극적인 기원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다(Hou- lden).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본문은 앞 절의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와 병행을 이룬다. 9절에서의 '보내심'(* , 아페스탈켄)은 완료 시상인 반면에 본절의 '보내셨음이니라'(* , 아페스테일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부정 과거 시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구현된 특별한 속죄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화목제'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몬'(* )은 본래 '달래는 것'(propitiation)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의미는 단순히 성난자를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속죄(expiation)를 전제로 한다(Dodd, Westcott).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속죄함이 없이는 죄로 인해 형성된 하나님과의 소원한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본절의 '힐라스몬'은 '속죄'(expiation)의 의미와 '화목'(Propitiation)의 의미 둘 다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제로 보내심으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9절, Barker, Stott).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 '이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는 9,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시된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고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한편 '하셨은즉'의 헬라어 '에이'(* )는 사실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이유나 근거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이 이후에 언급되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께서 주신 계명으로(요13:34,35; 15:12,17)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요한의 이 권면은 당시 사랑의 계명을 평가절하하는 이단적 교리가 수신자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Smalley). 한편 '마땅하도다'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로멘'(* )은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시사한다. 물론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 사항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실천 행위이다.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본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유대적인 사상으로(출33:20,23; 신4:12)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본문에 대해 혹자는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그러나 그렇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은 수신자들 사이에서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기 때문이다(Schnackenburg, Barker). 영지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아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한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대하면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사랑의 계명을 연결시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그리스도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라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14절; 1:1-3; 요1:18; 12:45; 14:9; 17:24).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 요한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았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격하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비록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행함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품 속에 독생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사랑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자신들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 '거하시고'의 헬라어 '메네이'(* )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간의 지속적인 친근한 관계를 나타낸다(요15:1-10). 하나님의 내주와 깊은 관계를 나타내는 '메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내주와 지속적인 관계로 인해서 이루어 진다(Stott). 즉 하나님의 내주와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랑의 행위의 근거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 안에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 '그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아우투'(* )에 대한 이해는 그 안에 나타난 속격과 관련하여 세 가지가 가능하다. (1)혹자는 주격적 속격으로 이해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Brooke, Wengst). (2)혹자는 목적격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odd, Lewis). (3)혹자는 속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Schnackenburg, Law). 이러한 세 가지 해석은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온전히 이루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테텔레이오메네'(* )는 완료 시상으로 지속적인 성취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랑의 성취에 대한 요한의 주장은 2:5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요한은 2:5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임을 암시한다(Smalley).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을 통해서, 즉 인간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Barker, Westcott, Stott).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는 '호티'(* , '왜냐하면')로 시작하는 절로서 본문 하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의 근거가 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1-3절; 고전12:3).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한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여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즉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할 수 있도록 내적인 증거를 제시한다(3:24). 한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내는 '거하고'(* , 메노멘)와 '아느니라'(* , 기노스코멘)는 현재 시상이다. 이 현재 시상은 믿는 자가 경험한 내주의 확신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요한이 '기노스코멘'을 사용한 것은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성령을 공유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며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교제함으로써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한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이러한 교제, 즉 상호간의 내주(內住)는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을 가리킨다(3:24; 요3:5,6; 갈5:6).

=====4: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 아들의 칭호인 '구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테라'(* )는 예수께서 승귀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2:22,23) 사람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음을 시사한다. 이 역시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그들은 구원을 신비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죄보다는 무지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육체로 오신 예수께서 구주이시며 그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를 사함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언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있다(2,10절; 1:7; 2:2; 5:6, Schnackenburg). 한편 '보내신'의 헬라어 '아페스탈켄'(* )은 9절과 같이 완료 시상이다. 이는 과거에 아들을 보내신 성육신 사건과 그의 구속 사역의 효력이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Stott).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을 직접 지켜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ooke, Schnackenburg, Wengst). (2)혹자는 기본적으로 사도들을 의미하며 그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Westcott). (3)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애를 지켜 본 목격자들과 연합한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Dodd). 이와 같이 '우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할지라도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보았고'(* , 테데아메다)는 완료 시상이며 '증거하노니'(* , 마르튀루멘)는 현재 시상이다. 비록 둘 사이에 시상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과거에 보고 응답한 믿음과 현재에 그 믿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연속적이며 지속적인 효과를 시사한다. 성령을 수여받은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12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되신 예수를 알게되며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 깊이를 더해 갈 뿐만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요15:26).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 '누구든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가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신들만이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단 하나의 전제 조건,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기만 하면 누구나 예외없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한다. 한편 '시인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세'(* )는 부정 과거이다. 영역 성경에서는 이 과거 시상을 표현하기 어려워 두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1)미래 시상으로 번역한다(shall confess, KJV). (2)현재 시상으로 번역한다(acknowledges, NIV, NEB; confess, RSV). 그러나 본문의 '호몰로게세'는 미래 시상이나 현재 시상이라기 보다는 비록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을지라도 공적으로 고백하는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봄이 훨씬 더 타당하다(Stott, Smalley).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의 내주를 가능하게 하는 믿음과 순종의 고백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13절).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 본문은 13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처럼 상호간의 내주도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고 확신하게 된다(3:1,2).

=====4:16
본절이 속한 단락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절이 11-15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본절부터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Marshall, Schnackenburg). (2)혹자는 앞절과 연결되어 11-16절까지 한 단락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Law, Stott, Bark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문맥상 13,15절에서 언급된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진술이 본절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진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 '텐 아가펜 헨 에케이 호 데오스 엔 헤민'(* )은 문자적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사랑을'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 속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Law, Marshall, Westcott, Smalley). 한편 '알고 믿었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 카이페피스튜카멘'(* )은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사도들은 물론 모든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미 과거에 경험하여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알고 믿고 있음을 시사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확신할 수 있다. 요한은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황홀경이나 특별한 지식에 의해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한 것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의지하는 믿음에 달려있음을 선포하고 있다(9,10,14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본문은 8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주장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는 자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속성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 본문은 13,15절에서 전술된 바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보다 발전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며(13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때 성취된다(15절).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나타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의 삶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Smalley, Dodd).

=====4:17
이로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 )가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문 다음에 언급되는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2)혹자는 16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Marshall).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본문은 앞절과 이어지는 단락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 '사랑'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2)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tott). (3)혹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aas). (4)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Houlden). 이러한 네 가지 견해 중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안'(* )은 2:5에서 온전히 성취된 사랑과 연결되어 '순종'으로 묘사되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담대함이 믿음과 결과로 나타난다(요3:18; 5:24). 이러한 사실은 사랑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지속적인 내주를 이루며, 그 내주로 말미암아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됨을 시사한다. 즉,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이룬다(Smalley, Westcott).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호티 카도스 에케이노스 에스틴 카이 헤메이스 에스멘 엔 토 코스모 투토). - 이는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그가 어떠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1)예수의 영원한 순수성, 사랑, 의로우심,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의미한다(Brooke, Westcott, Haas). (2)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유혹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교제를 나누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할 것을 암시한다(Barker, Smalley, Stott).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 )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한다(행9:31; 롬3:18; 고후5:11; 7:1; 엡5:21). 그러나 본절에서의 '포보스'는 앞절의 담대함의 반대 개념으로 노예가 갖는 두려움을 가리킨다(요19:38; 20:19; 롬8:15). 이러한 '포보스'는 사랑과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전혀 두려움이 없이 담대해질 수 있다. 비록 죄는 두려움을 유발시킬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을 소유한 자들에게 사랑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본문은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형벌'에 대해서 혹자는 마지막 날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정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며(Schnackenburg), 혹자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는 고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Bultmann).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Haas, Marshall). 즉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사랑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게 되며 그 결과 마지막 날에 죄로 인한 정죄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갖는 담대함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반의 접속사인 '데'(*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데'는 본문이 17절 상반절의 내용, 즉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하나님의 사랑'을 역으로 진술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로 인하여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Westcott, Law). 그러기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었다. 이와 반대로 만약 누구든지 담대함이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그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성취하지 못한 자이다.

=====4:19
요한은 10절을 반복하여 진술함으로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사랑의 원리에서 출발하여 20,21절에서 형제 사랑의 문제로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 )은 문자적으로 '우리가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목적어가 없다. 목적어의 부재로 인해 '사랑'의 대상인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tott, Houlden). 이들은 앞절의 진술과 연결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2)혹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이들은 20,21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된 것과 연결시켜 해석한다. (3)혹자는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전후 문맥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어느 하나를 제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본문은 이유를 나타내는 '호티'(* , '왜냐하면')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근거를 나타낸다. '사랑하셨음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가페센'(* )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시상은 전순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을 가리킨다(9,10절, Law, Smalley).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의 삶은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 '누구든지'의 헬라어 '에안 티스'(* )는 본서에서 거짓 이단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 방법이다(1:6,8,10; 2:4,9). 본문 역시 수신자 공동체 내에 팽배해 있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공동체 내에서 신비한 지식을 통해 구원을 받고 다른 일원보다 우월하다는 환상에 빠져 타인을 돌보지 않았다. 요한은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반드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게 됨을 강조한다. 여기서 '형제'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교회 밖의 일반적인 사람들 전체를 가리킨다(7,11,19절). 즉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만을 향한 것이며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거짓말하는 자니'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Barker, Smalley). (1)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자며, 그 진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자이다. (2)거짓말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임을 드러낸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자들이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문이 상반절에서 언급된 '거짓말하는 자'의 근거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거짓말쟁이인 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서 표현된다(12절). 즉 그리스도인은 타인에 대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타인을 사랑하게 된다.

=====4:21
본절의 헬라어 본문은 '카이'(* , '그리고')로 시작하여 본절이 20절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 요한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Stott).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반영한 것으로(막12:29-31) 요한은 이 계명에 대해 본서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으로 진술하고 있다(3:23; 요이1:5,6). 한편 '주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 아우투'(* )는 문자적으로 '그로부터'라는 의미이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illiams, Stott, Westcott). (2)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며 상호보완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Thursday, January 28, 2010

로마서 14장 1절 ~ 23절(형제를 심판하지 말라)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 톤 데 아스데눈타테 피스테이) - 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접속사 '데'(* , '한편')는 12:1-15:13에 이르기까지의 대 문단 내의 새로운 소 단락으로서 새로이 주제가 전환됨을 표시해 준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말은 4:19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상기시켜 준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본절의 '연역한 자'(* , 아스데눈타)란 말과 4:19의 믿음이 '약하여 지지'(* , 아스데네사스)란 말이 모두 '약하다'를 의미하는 '아스데네오'(* )의 변화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서 살펴볼 때 즉 4:19의 '약하여지다'는 여기 본문의 구절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4:19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약화, 다시 말해서 불리한 환경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지 못한 행위를 의미하지만, 본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원의 근본 원리로서의 '믿음'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고전 8:7, 9, 10;9:22의 '아스데네스'(* , '약한')나 고전 8:11, 12의 '아스데네오'(* , '약하다')를 통해 알 수 있는 성격의 약함이다. 즉 본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연약성은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의 연약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 확신이 약하다는 뜻이다(Sanday and Headlam).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볼 때 '믿음이 연약한 자'란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8:26). 그런데 본절의 경우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떤 날을 예배일로 지켜야 되는지에 관한율법 사항들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즉 교회 내부의 유대적 요소를 지키기를 주장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런 자들은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할 자유를 지각(知覺)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Calvin, Harrison).
너희가 받되(* , 프로슬람바네스데) - 이 단어는 '받아 들이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친절하게 대하다'를 가리키는 '프로슬람바노'(* )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너희들이 받아 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의 대상이 되는 '너희들'은 대체적으로 '강한 자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강한 자들은 음식물에 관한 이전의 구약성경의 규례를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거부하고 또한 어떤 특정 음식을 피하는 일에서 자유로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즉, 자신들의 동아리 안에 그들을 받아 들이고 동시에 그들을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교제하며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들로서 따뜻하게 인정해야 했다. 또한 이 단어는 공동체 전체 안에서의 공식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교제에서 형제로서의 용납을 의미한다(Kasemann). 그런 의미에서 '프로슬람바노'는 행 18:27과 28:2에서도 같은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 속에서 우러 나오는 환영을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welcome;RSV, LB).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바울은 여기서 연약한 자를 받을 때 특별히 주의할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는 성향이 있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약한 자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생각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강한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연약한 형제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으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열등감이나 결함, 혹은 색다름을 느끼지 않도록 그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베푸는 일뿐이다. 여기서 '비판'을 가리키는 '디아크리세이스'(* )는 '다툼', '구분', '판단', '결정', '논쟁'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며 '의심'을 가리키는 '디알로기스몬'(* )은 '추론', '생각', '의견', '거리낌', '주저함'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디아크리세이스'는 '비판', 혹은 '판단'이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고 '디알로기스몬'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거리낌'인 듯하다(Cranfield). 즉, 약한 형제가 꺼려하는 일들을 비판 내지는 판단함으로써 그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 조건을 도입한 것이다. 아울러 이 구절은 강한 자들이 누리는 내적 자유에 대한 외적 표현을 약한 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Sanday and Headlam).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 음식물에 관한 금기(禁忌)가 바울 당시에는 흔히 있었다. 유대적 전통(레 11:1-47)도 있었고 생명있는 것을 꺼린다는 당시의 통념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다. 물론 고대에는 식물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이 아직 발전되지 않았다. 또한 금욕 생활을 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음식을 절제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시대적 경향들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조하는 자도 있었고 그렇지 않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 있는'(* , 피스튜에이)이란 말의 의미는 그 반대말 '연약한 자'(* , 아스데논)란 말에 의해 결정된다. 즉, 연약한 자와는 달리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다(Meyer, Godet). 바울 역시 믿는 자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이것이 바울의 기본 입장이었다(딤전 4:3, 4). 한편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음식물을 채소로 제한한다. 여기서 '채소를 먹느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라카나 에스디에이'(* )로서 육식과 정반대되는 채소만 먹는다는 뜻이다. 즉, 채소 외의 다른 것을 먹지 아니한다는 것이다(창 9:3;잠 15:17;Godet). 그들이 음식물에 대해 이 같은 태도를 취한 데에는 의도적으로 부정한 음식을 피한다는 종교적 이유(레 11장), 고기를 먹지 않으면 보다 건강하게 된다는 건강상의 이유, 그리고 살아있는 것을 먹기를 꺼려하는 의식적인 이유 등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연약한 자들의 이 같은 자기 제한(먹거나 안 먹거나 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신앙의 분량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12:3).

=====14:3
업신여기지 말고 - 바울은 믿음이 강한자와 약한 자가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위험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먼저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에 대해서 '업신여기지 말아야'(* , 메 여수데네이토)할 것을 명령한다. 여기서 이 용어는 '여수데네오'(* )의 현재 중간태 명령법으로 '업신여김', '멸시함'(contempt, NEB) '경멸함', '얕봄'(despise, KJV)의 의미로 쓰여졌다.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소심한 태도를 멸시하는 눈초리로 대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단절되고 말 것이다(Godet).
판단하지 말라 -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는 강한 자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라'(* , 메 크리네토)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를 언급하면서 '정죄'(* , 카타크리시스)라는 표현보다 '판단'(* , 크리네인)이란 단어를 쓴 것은 주로 강한 자들의 행위를 비판함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Lenski). 음식을 채소로만 제한하는 연약한 자들은 모든 음식을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믿음이 강한 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그들을 성급하게 판단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 이 말씀은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양쪽 다 언급한 것으로 특별히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좀더 강조점을 둔 것이다(Godet). 강한 자나 연약한 자는 결코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바울은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자든 연약한 자든 구별치 않고 양쪽 모두 자신과의 교제 관계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容納)하셨던 것이다(Robertson).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 사이에 서로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에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 조건 없이 그들 모두를 용납하셨던 하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Calvin).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 바울은 위와 같은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 하인과 주인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반문의 형식은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 즉 먹는 자와 먹지 못하는 자를 엄히 질책(質責)하고 있는 것이다. 집 주인을 제쳐두고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하는 하인이 있다면 그 같은 행동은 주인의 영역을 월권(越權)하는 행동이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주인 앞에서 정당화 될 수 없다(Harrison). 하인들의 행위는 오직 주인만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인들의 행위는 주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하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둘로스'(* , '노예')가 아니라 '오이케텐'(* , '가사를 돌보는 머슴')이다(Bruce).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 바울은 계속해서 종의 행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그를 세운 주인에게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 , 퀴리오스)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집 주인이다(Godet). 그는 그의 집 하인들을 다스릴 '권능'이 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테이'(* )는 바울의 서신서에서만 발견되는 동사(고후 9:8;13:3)로 하인을 다스릴 수 있는 주인의 왕적 능력을 묘사하고 있다(Dunn). 이 처럼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에게 있어서 멸시하고 판단하는 행위는 그를 세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판단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바울은 서로를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14:5
본절에서는 날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다루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일반적인 성향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종교적 의무와 관련하여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인류 사회가 길일(吉日)과 흉일(凶日)을 구분하여 날들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에 복음이 전하여졌을 때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분명히 있고, 비록 복음이 전해진 사회에서도 성도의 자유 문제와 연관지어서(갈 4:9ff.;골 2:16) 안식일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 '혹은...혹은...'(* ... ..., 호스멘...호스 데...)은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지시 대명사이다(Robertson). 본 구절은 사람들이 날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성향을 말하고 있는데, 어떤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다른 날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 헬라어 본문에는 '같게'(alike)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모든 역본들(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KJV, RSV, NASB, NIV, NEB)에서는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는 것을 감안하여 의미상 '같게'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모든 날을 같게 여긴다는 것은 모든 날들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Bruce). 이에 바울의 가르침대로 따른 자도 있었지만, 종교적 양심으로 인하여 따르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시키면서 '날'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 이는 다른 사람이나 종교적인 규례로부터 영향을 받지 말고 주체적인 신앙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모든 날이 주의 것이라고 가르치고,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자들은 이러한 자유함을 육체의 기회로 삼거나(갈 5:13), 또 어떤 이들은 이로 인해 걸림돌이 되었고(고전 8:9), 어떤 이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고 하는 것은 신앙은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결단할 것을 중요하게 여겨 무엇보다도 그 관계가 우선되어야지 다른 사람과의 결단이 그보다 우선되거나 중요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 흠정역(KJV)에는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해 중히 여기지 않으며'(and he that regardeth not the day, to the Lord he doth not regard it)라는 문구가 첨가되어 문맥에 어울리도록 했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바울이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추정해 보면, (1) 문맥상 생략해도 뜻이 통하는 것으로 여기고 구차하게 언급하지 않았거나, (2) 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논지는 앞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생략했거나, (3) 독자들이 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상태를 지적하여 날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주를 위해서라면 가능하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 여기서 '주를 위하여'(* , 퀴리오;'주에게')와 '하나님께 감사한다'(* , 유카리스 테이 토 데오)라는 문구가 반복되는데, 이는 사람들의 눈에 '약한 자'가 됐든지, '강한 자'가 됐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킨다(Harrison). 사도 바울은 먹는 것에 대해 자유로울 것을 가르치면서(딤전 4:3ff.), 이러한 문제로 교회가 나누어지거나, 헛된 논쟁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지금까지 언급하였던 음식과 날에 대한 로마 성도들의 태도를 일단 정리한다.

====14:7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 바울은 앞에서 음식 문제와 종교적으로 날짜를 지키는 문제 등 구체적으로 로마 교회 성도들의 두 가지 생활 영역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언급하였다(1-6절). 바울은 교회 생활 영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도들이 취해야 할 생활 원리들을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구분해서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성도들이 취해야 할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첫번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데이스 헤몬 헤아우토 제'(* )로 여기서 '헤아우토'(* , '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현세의 연락(宴樂)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취하는 '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바울의 신앙 고백이며(갈 2:20)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 이후 바울의 일관된 삶의 원리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불신자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욕심으로 점철(點綴)된 역사였다. 이러한 불신자의 삶의 세계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값으로 사신 바(고전 6:19, 20)되었고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기 때문이다(Calvin). 성도의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두번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데이스 헤아우토 아포드네스케이'(* )로 성도의 삶은 죽음도 자신에 의하여 주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예속된 것임을 나타낸다(Olshausen). 바울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주를 위해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0, 21)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삶의 원리들을 권면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주를 위한 일관된 일사 각오(一死覺悟)의 삶을 살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므로 얻는 확신에 근거하여 다른 성도들을 향한 권면에서도 성도의 삶의 원리를 근본적인 모든 문제의 해결점으로 선언한 것이다.

====14:8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바울은 본절에서 좀더 본질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내적인 삶의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도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Tholuck).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생(生)과 사(死)에 있어서 궁극적인 표준이 되신다(Hendriksen). 이 말씀은 앞절 '자기를 위하여 사는'(* , 헤아우토 제)과 대조되어 '투 퀴리우'(* , '주의 것')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린 값으로 산 것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도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거나 자신을 스스로 주장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전 6:19, 20)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왜, 음식과 절기의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생사(生死)의 문제까지 끌어올려 말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Lenski).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일상의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께 대한 믿음과 청지기적 사명으로 부터 출발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여야 한다(고전 10:31).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 이 말씀은 앞절에 대한 확증적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고 다시 살으심은 산 자의 주가 되기 위해서임을 말하는 것이다(Bruce). 서두에 '이를 위하여'(* , 에이스 투토)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 준다.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主)가 되시기 위하여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은(고전 15:3, 4;고후 5:15), 우주적인 만물에 대한 통치권과(Kasemann)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인생의 주권자가 되심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Calvin). 한편 '다시 살으셨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 에제센'(* )은 '그가 소생하셨다'란 뜻으로 죽음에서 일어나신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神性)과 구세주(救世主)로서의 예수님과 만물에 대한 그의 주권을 입증하는 것이다(Harrison). 또한 그것은 새로운 삶이 주를 위해서 예비되었으며 그의 성도에 대한 주권과 능력이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업신여기느뇨 - 바울은 앞서 3절에서의 책망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첫번째는 연약한 형제에 대한 언급이다. 즉, 채소만 먹는 자들이 고기를 먹는 자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판단하느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크리네이스'(* )로 의문문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책망에 대한 좀더 강한 어조이다. 연약한 형제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성숙하지 못한 신앙으로 믿음이 강한 자를 판단한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너희가 무슨 권리와 근거로 그들을 일방적으로 판단하는가 ?'하며 연약한 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도록 질문 형식으로 그들의 행위를 깨우치고 있다. 두번째는 믿음이 강한 자들에 대한 언급이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업신여겼다. 즉,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 고기도 먹고 채소도 먹는 자들이 채소만 먹는 자들을 업신여겼다. '업신여기느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여수데네이스'(* )로 강자가 약자를 멸시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책망하고 있다. 양자간에 이러한 태도는 결코 어느 쪽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모두 온당치 못한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 모두가 서로간에 판단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장래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여기서 '심판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마티'(* )는 운동 경기에서 심판이 서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장소에 있는 심판은 경기 도중에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보면 즉시로 그들의 자격을 박탈하여 정정당당하게 경기하도록 하며 승리한 자에게는 상을 주었다(고전 9:24-27). 따라서 각자는 그 날에 자기가 행한 대로 직고하며 선악간에 심판을 받을 것이니 남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는 행위를 삼가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11, 12절).

====14:11
기록되었으되(* , 게그랖타이 가르) - 이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은 혼합형으로서 사 45:23과 49:18을 결합시킨 것이다. 바울은 기억에 의존하여 두 구절을 무의식적으로 혼합 인용했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인용했을 것이다(Dunn). 아무튼 어느 방법이든 간에 구약성경의 권위있는 가르침을 인용하여 자기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 인용문 역시 앞절(10절)에서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를 엄하게 책망하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상기시킨 교훈에 대해 구약성경으로 인증(認證)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Hendriksen).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 , 조 에고, 레게이 퀴리오스) - 이 말은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민 14:28;사 49:18;렘 22:24, 46;겔 5:11;14:16;16:48;17:16;18:3;20:13), 반드시 성취될 중차대한 진리를 선언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주께서 중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요 3:3, 5, 11;5:19, 24,25)라는 규칙적인 관용구를 사용했던 것과 흡사하다.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 사 45:23의 문자적 인용이다. 다만 '여소몰로게세타이'(* , '자백하리라')와 '파사 글롯사'(* , '모든 혀')이 두 단어 순서가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준 이 예언의 말씀은(사 45:23) 여기서 구약성경의 원래의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 즉, 한 분이신 지고(至高)한 하나님의 최종적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최후 심판시에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무릎꿇고 인정할 것이다(사 45:21). 예컨대 남을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행위는(10절)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심판의 영역을 침해한 것이다. 따라서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우상 숭배의 올무에 빠지는 행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1:21-25). 그리고 '자백하다'(* , 여소몰로게오)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70인역(LXX)에서 '인정하다', '자백하다', '찬양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15:9;마 11:25;눅 10:21;Dunn). 이는 모든 사람이 최후에는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자백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내용에 대해 모든 인류가 주께 찬양하며 경배하고 복종하게 됨을 나타낸다. 즉,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판단하는 이방인들의 회심(悔心)을 암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 행위인 구원과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이 자기들이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방인들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의 회심이 이스라엘과 성경에 의해서 선포된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순종임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 안에서 서로 받을 것을 촉구한 것이다. 아울러 사 45:23의 인용문이 빌 2:10, 11에서는 부활하시고 승귀(昇歸)하신 그리스도의 신분과 역할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자백'을 말할 때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하나님께 자백하리로다', 즉 하나님의 심판에 적용되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주권과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자신의 통상적인 습관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4:12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 앞에 나온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끌어낸 권고적인 결론으로서 이것은 10절의 사상을 되풀이 한 것이다. 여기서는 각 단어가 매우 강조적인 것으로서 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Denney, Cranfield). '각인'(* , 헤카스토스)은 어느 쪽도 배제(排除)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즉 판단하는 자나 판단받는 자 양쪽 모두를 가리킨다. '자기 일을'(* , 페리 헤아우투)은 자기가 판단하는 형제의 일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해서 직고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께'(* , 토 데오)는 자기 파당이나 혹은 자기와 친밀한 동료에게가 아님을 강조한다. 즉,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을 다 아시되 사람 마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 직고해야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히 4:12, 13). '직고하리라'(* , 로곤 도세이)는 장부에 적힌 대로 세밀히 '보고하다', '회계하다', '계산하다'는 뜻으로 심판의 철저성을 나타낸다(요 3:17). 신약성경의 용례를 보면 마 12:36;눅 16:12;행 19:40;히 13:17;벧전 4:5 등에서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다고 하여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최후 계산(셈)을 면제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2:6-16;고전 3:12-15;고후 5:10)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예외없이 각각 자기가 행한 일을 하나님 앞에서 자백할 뿐만 아니라 계산해야 한다는 진리를 각 단어마다('각인',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강조하여 선언한 것이다.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 이것은 앞 단락의 권면을 간결히 요약한 것이다. 또한 이 부분은 10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에서 끌어낸 결론으로서 이제 더 이상 서로 판단(비판)하는 습관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권면은 강한 자와 약한 자, 양 집단 모두에게 주어진 교훈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Godet, Dunn, Althaus, Gaugler, Cranfield). 마 7:1과 그 병행구에 나타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에 이 본문이 의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Dunn).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이것은 특별히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이다(Murray, Cranfield, Godet). 사람의 행동이 형제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특히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다(Cranfield, Godet, Murray). 예컨대 바울은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즉 바울은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할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비록 바울이 믿음이 강한 형제라고 직접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형제 앞에 거치는 것을 놓치 말라는 이 훈계에서 믿음이 강한 형제를 염두에 두었음이 틀림없다. 바울은 앞에서도 믿음이 강한 형제들에게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말라고 경계한 바 있다(3, 10절). 이제 본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연약한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주의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부딪힐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콤마'(* )는 글자 그대로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지게까지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stumbling block;KJV, RSV). 그리고 '거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론'(* )은 어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마련된 장애물 또는 덫(obstacle;NIV)을 뜻한다(Meyer, Murray). 즉 이 용어는 죄로 끌어 들이기 위해 유혹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묘사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의 십자가 지는 것을 만류하려 했을 때 '스칸달론'을 베드로에게 사용했었다(마 16:23). 그리고 이 두 용어는(프로스콤마, 스칸달론) 의도적으로 형제를 꾀어 그에게 죄가 되는 것을 행하도록 유혹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경고로서 사용된 것이라 하겠다. 비록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동기가 한 형제를 '연약한 자'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순수한 열망에 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본절에서 믿음이 강한 성도들에게 촉구하는 것은 (1) 그들이 다른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것과 (2) 다른 형제들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의 훈계는 강한 자들의 어떤 행동이 다른 성도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도 있고 근심되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강한 자들이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그 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일을 한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 ?'를 늘 생각하여 공동체의 건덕을 위해 사려깊은 행동을 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Harrison).

====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 이는 강조적 문구로서 절대적인 자기 확신을 말한 것이다. '확신하다'(* , 페이도)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용례를 보면 갈 5;10;빌 2:24;살후 3:4에서 강조 완료 능동태 1인칭으로 '주 안에서'(* , 엔 퀴리오)라는 어구와 그 뒤에 '호티'(* , that)절과 함께 쓰여 자기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페이도'(* )의 완료 수동 1인칭 단수인 '페페이스마이'(* )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이다 카이'(* , '내가 알다')가 앞에 놓임으로써 '페페이스마이'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또 본절에서는 * ('엔 퀴리오', '주 안에서') 다음에 '예수'(* )라는 호칭이 덧붙여졌다. 이는 '호티'(* , that)절의 내용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렇다면 '주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거기에다 '확신한다'는 말을 수동형으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 바울이 가진 확신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생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얻은 객관적인 진리임을 의미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복음 안에서 갖는 확신임을 뜻한다. (2) 바울이 여기서 예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사용한 것은 역사상의 예수의 어떤 특정 가르침, 즉 마 15:10, 11, 15-20;막 7:15-23 등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 아울러 자기의 확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위의 세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여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합니다'고 강력하게 자기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Godet, Meyer, J. Murray, Cranfield).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 이 말은 바울이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진리로서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의 헬라어 '디 헤아우투'(* )는 '그 자체가' 혹은 '본질적으로'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주신 음식물 그 자체'를 말한다(Godet, Cranfield, Sanday). 바울은 여기서 인간들의 행위, 태도, 욕구, 사고 등에 대해서 논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피조(被造) 세계의 자원, 그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먹는 음식으로 주신 모든 것 그것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없으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의 헬라어 '우덴'(* )은 본절에서 제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이논'(* , '속된 것')이란 단어 역시 그 자체는 불견하고 순결치 못한 것 특히 율법의 의식에서 깨끗치 못한 것을 의미하나(막 7:2, 5;행 10:14;히 10:29;계 21:27) 여기서는 어떤 음식물도 그 자체는 속(俗)된 것, 즉 불결한 것이 없다는 것을 천명한다. 결국 바울은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먹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본절에서 뿐만 아니라 딤전 4:4에서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확언함으로써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음식물에 대한 강한 자들의 기본 입장과 사도의 견해가 일치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취해야 할 정당한 원리가 된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1) 바울의 주장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확신하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막 7:15-23)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 가운데는 모든 음식물이 그 자체는 깨끗하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Harrison). (2) 창조에 관한 말씀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의 견해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창조 기사의 말씀과 그 원리를 같이하고 있다. (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이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바울의 확신은 아주 타당한 것이다(히 9:12). 이는 '속되다', '속되지 않다'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는 구약 율법의 의식적 부분에 관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새 시대가 도래하여 옛 시대의 그 의식법(儀式法)에 문자적으로 순종할 필요가 없다. 신약의 빛 아래 사는 우리는 이제 구약의 그 의식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즉 그리스도 그분을 믿을 때 그 의식에 순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Calvin, Kasemann, Cranfield).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구약의 의식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해 주어진 이상, 그리고 구약의 율법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영원하신 속죄의 제물이 되어 거룩한 사역을 완성하신 이상, 이제는 더이상 구약의 율법 의식에서 불결한 것과 정결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문자적으로 매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런 진리를 파악하여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하여' 율법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음식이 더 이상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이런 진리를 아직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신자들, 즉 진리 안에서 내적 자유를 얻지 못한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이 의식법에 대한 문자적 순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 종교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금지되었던 고기들은(음식물은)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더 이상 부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스스로 속되게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여전히 불결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는 바울의 확신을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음식물을 깨끗하지 않다고 그의 마음에 확신한다면(레 11장 참조) 그에게 있어서 그 음식물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分量)과 함께 신앙 양심의 자유에 근거한 개인의 확신에서 행해지는 것이므로 누구도 판단할 성격이 아님을 양쪽 모두에게 절묘하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Murray, Meyer). 이런 뜻에서 바울은 전반절에서 약한 자에게 강한 자의 믿음의 수준을 이해시키면서 음식물의 본질에 대한 진리를 설명한 반면 후반절에서는 강한 자에게 약한 자의 믿음 분량을 깨우쳐 준 것이다.

====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가르'(* , '왜냐하면')는 바로 앞절(14절)과 연결된 접속사가 아니라 13절 하반절과의 연결 접속사이다. 14절은 삽입절이다(Meyer, Liddon, Hendriksen). 즉 '연약한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말 것을 결심하라(13절) 왜냐하면(* , 가르)는 만일 그것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15절).' 이렇게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본절은 바울이 강한 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를 수락한다는 점을 명백히하고 동시에 그러한 태도에는 잊지 말아야 할 중용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여기서 '근심하게 되면'의 헬라어 '뤼페이타이'(* )는 '뤼페오'(* )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수동형으로서 '어떤 일의 영향을 받아서 양심의 괴로움을 겪는 것'을 말한다. 또는 '어떤 일로 인하여 신앙의 압박을 받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고민에 쌓인 것'을 뜻한다. 요컨대 상처받은 양심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마 14:9;17:23;막 10:22;요 16:20;Meyer, Godet, Hendriksen). 즉 믿음이 약한 자가, 자유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 때문에 아직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어떤 일을 행하게 된다면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의 신앙의 순결성과 성장에 손상을 입을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믿음이 강한 자의 자유가 제한을 받아야 함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바울은 자유의 구가(謳歌)가 보다 중요한 형제 사랑에 의해 절제되어야 할 것을 호소하면서 성도의 생활과 행동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벧전 4:8;요일 3:16;4:8).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 의식적인 율법과 관련한 자신의 내적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믿음이 연약한 형제에게 강요함으로써 아직 깨달음과 행위가 거기에 이르지 못한 형제를 근심케하고 영적으로 파멸(破滅)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짓밟는 행위임을 말한다. 루터(Luther)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어떤 것이 정당한 믿음의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당신의 형제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당신은 잔인한 살인자와 같다. 뿐만 아니라 내 형제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멸하는 것이 되기에 그것은 온갖 종류의 잔인성을 능가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연약한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도 죽었기 때문이다"(고전 8:11).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표현한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염두에 둔 것이다. (1) 한 형제의 소중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여 구원한 형제임을 생각할 때 그가 아무리 연약한 자라 하더라도 사랑으로 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도 남는 것을 교훈한다. (2) 형제를 근심케 하는 일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 자유의 구가보다도 사랑의 원리를 따라 형제를 생각하며 행동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의 희생(犧牲)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내와 희생이 거절되어 자기의 판단대로만 행하므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근심케 되어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무서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죄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짓밟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모울(Moule)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주께서는 너의 상처받는 형제를 그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너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의 행동은 너의 강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상처받은 형제에게 파멸을 가져오게 한 것으로 간주되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너의 우둔하고 편협하며 이기적인 자유로 인하여 네가 경시한 이 상처받은 영혼을 주님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너무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것이다." '망케 하다'(* , 메 아폴뤼에)는 말은 대체적으로 네 가지로 해석된다. (1) 한 영혼을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Tholuck). (2) 죄를 짓게 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실족한 자리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Murray). (3) 철저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Meyer). (4) 인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Kasemann). 여기서 우리는 (1), (2)의 견해를 취함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바울이 연약한 자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말 것을 촉구한 것(13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물론 연약한 자가 계속 죄를 지어 하나님과 단절된 자리에 있다면 결국 멸망에 빠지게 됨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3)의 견해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형제를 넘어뜨리는 일의 위험성과 이로 인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강한 자들에게 하는 데 있다. 즉 자유에 대한 자기 본위의 주장은 연약한 자들을 무너뜨리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냉엄하게 책망한 것이다.

====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이 구절은 적어도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1) 이 구절은 강한 자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에게 주어진 것인가 ? (2) '휘몬 토 아가돈'(* , '너희의 선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3) 사도가 언급한 비방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1)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너희의'(* , 휘몬)는 (까)강한 자들만을 가리킨다(Murray). (다)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를 가리킨다(Dunn, Sanday and Headlam). (까)의 견해가 더욱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도는 바로 앞절에서 강한 자들에게 연약한 자들을 근심시키거나 망케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앞절의 강한 자들에게 계속되는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2)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여기서 '너희의 선한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까)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언약적인 모든 축복을 총괄하는 선이다. 즉 의와 구원까지 포함한다(Dunn, Michel, Nababan, Cranfield, Schlier). (다) 강한 자들이 누리는 자유, 특별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말한다(Murray, Calvin, Harrison, Kasemann, Godet, Sanday and Headlam). (따) 하나님의 왕국(Meyer). (마) 믿음(Do Wette). (바) 복음(Philip). (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 전부와 복음(Lenski). 위의 견해 중 (다)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첫번째 문제에서 이 구절이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입장을 지지했다면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 역시 강한 자들이 행사하는 '신앙의 자유'를 말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까)이나 (바)을 지지하는 자들은 이 구절이 훨씬 더 심각한 한 가지 위험에 대해 강한 자들이 자유 행사를 이기적으로 고집함으로써 이 자유보다 훨씬 더 존귀한 '아가돈'(* , '선')에 대해 해(害)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가돈'(* )은 강한 자들의 '아가돈'임과 동시에 약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아가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아가돈'은 복음 그 자체, 곧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관거에 행하셨고 지금도 행사하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강한 자들을 향해서 경고되고 있는 현재의 문맥을 뛰어넘는 해석이다. 한편 (3)의 문제에 대해서도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까) 바울이 비방자들로서 염두에 둔 사람들은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다(Sanday and Headlam, Liddon). (다) 교회 내의 약한 신자들, 즉 채소만 먹는 약한 자들을 의미한다(Godet, Meyer, Hendriksen). 여기서 (다)의 입장을 취함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리고 '선한 것'이 복음, 혹은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당연히 (까)번의 견해를 취하겠지만 이 구절이 강한 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또한 '아가돈'이 '강한 자들의 자유'를 의미한다면 (다)번의 견해를 취함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본절은 강한 자들의 무분별한 행동이 약한 자들에게 여러 손상(13, 15절)을 끼칠 수도 있고 또한 교회내에 불협 화음을 일으킬 수 있기에 특별히 그러한 비방을 받지 않게 주의하라는 경고이다. 물론 교회 안에서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일이 생길 때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을 듣는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論據)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Sanday and Headlam). 강한 자들이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의'(* , 디카이오쉬네)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한다(Godet, Murray, Meyer, 6:13, 16, 18).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의'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서 더욱 확인된다. 한편 '평강'(* , 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Calvin, 5:1;빌 4:7). 그리고 '희락' 또는 '기쁨'(* , 카라)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Calvin, Hodge)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Godet, Meyer, Murray).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의'와 '평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 알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 알라)이란 접속사가 '...만',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의, 평강, 기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Kasemann). (3) 갈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Harrison).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본장 주제 강해 '아디아포라' 참조).

====14:18
본절은 19절과 함께 17절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삽입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Michel) 그보다는 17절의 내용을 다시 설명하고 확인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Kasemann).
이로써(* , 엔 투토) -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곤란한 구절로서 여러 견해가 있으니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성령 안에서를 의미한다(Hodge, Origen). (2)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리킨다(Meyer, Murray, Sanday and Headlam, Cranfield). (3) '이로써'를 가리키는 헬라어 본문 '엔 투토'는 '따라서', '이렇게 하여'를 의미하는 말이므로 17절에서 표현한 진리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다(Barrett, Robertson). (4) '이 방법들로써'를 의미한다(Michel). (5) 바울은 오직 교회 안에 평화를 진작(振作)시키고저 하는 뜻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엔 투토'라는 단수를 사용했다(Gaugler). 여기서 (4)은 매우 약하고 (5)은 무리이며 (1)과 (3)은 문맥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2)보다 덜 자연스럽고 덜 만족스럽다. 따라서 우리는 (2)가 가장 개연성있고 설득력있는 설명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 왜냐하면 문맥에 의해서 볼 때도 그러하고 또 다른 사본(the variant reading)에 '이로써'가 단수가 아닌 복수(* , 엔 투토이스, '이것들로써')로 쓰여졌다는 데서 더욱 확인된다. 이 복수는 분명히 필사자가 17절 하반절에서 말한 3가자 열매, 즉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 디카이오쉬네 카이 에이레네 카이 카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복수로 쓴 듯하다(Cranfield).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의 경우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세 열매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았기 때문이다(Sanday and Headlam, Murray). 이는 갈 5:22, 23에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말하면서도 '열매'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단수인 '카르포스'(* )가 사용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별문제없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봉사가 성령안에서 맺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의와 평강과 기쁜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은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피력한다(Hendriksen).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서 맺어지는 어떠한 섬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형제를 판단하고 서로 비방하는 자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한편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 도키모스 토이스 안드로포이스)는 말은 16절의 '비방을 받다'(* , 블라스페메이스도)와 대조적인 의미로 보아야 옳다(Cranfield). 즉,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람에게도 비방을 받지 않고 그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칭찬을 받는다'는 헬라어 '도키모스'는 사람에게 인정, 혹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모든 경우에서 사람의 칭찬을 받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역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유없이 미움을 받았고, 선지자와 사도들 역시 그러했으며, 바울 역시 그의 서신 딤후 3:12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이다(Calvin).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런 특별한 경우를 말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현상과 그 결과를 말한 것이다.

====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 '이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라 운'(* , '그러면', '그런즉')으로서 앞의 17, 18절을 받고 있는 접속사이다. 앞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그 본질을 명쾌히 제시하여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신다는 것을 원리적 측면에서 선포한 바울은 이제 그 원리가 실제적인 교회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발휘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힘쓰나니'의 헬라어 '디오코멘'(* )은 '급히 가다', '빨리 달려가다', '추구하다', '갈망하다'는 '디오코'(* )의 1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로서 현재 문제가 있는 교회 생활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가 적극적으로 애쓸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 것이다. 바울이 힘쓸 것을 촉구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화평의 일은 힘쓰라. '화평의 일'(* , 타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교회의 화합(和合)을 도모하는 모든 일을 포괄적으로 지칭한 말로서 초대 교회 설교의 관용구이다(딤후 2:22;히 12:14;벧전 3:11). 이는 시 34:14의 내용에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Dunn). 사도는 연약한 자와 강한 자 간의 조화를 위한 직접적인 적용으로 화평을 추구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촉구하는 '에이레네'(* , '화평')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Godet). (2)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 '덕(德)을 세우다'의 헬라어 '오이코도메스'(* )는 '집을 짓다', '건설하다', '굳게하다'라는 뜻인 '오이코도메오'(* )에서 나온 말로서 주로 '건축'에 관련해서 사용된 단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세우다'라는 은유법은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구약성경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예레미야가 이를 자주 사용하였다(렘 12:16;31:4;33:7;42:10;45:4). 그런데 이 비유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니 (1) 그 자신의 사역에 대해 설명할 때 이를 사용하였다(고전 3:9, 10;고후 10:8;12:19;13:10). (2)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벽돌처럼 연결되어 함께 성전을 지어 올라가는, 즉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권할 때 사용하였다(엡 2:19, 20;벧전 2:5). (3) 이 비유법의 가장 빈번한 용례는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들에게 준 충고에서 나타난다. 즉,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덕을 세우라는 권고로 나타난다(Dunn). 예컨데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남으로 야기된 여러 문제들을 다루는 데 바울이 사용한 핵심적인 단어 역시 '덕을 세우라'는 것이었다(고전 14:5, 12, 26, Harrison). 이를 종합하여 본절의 의미를 살펴보면 서로 덕을 세우라는 이 권고는 상호 대인 관계와 상호 의존성을 결정지어 주는 중대한 기준이 된다(15:2;고전 8:1;10:23). 그리고 서로간에 상이(相異)한 은사들의 상대적 가치를 분별하고 인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전 14:3-5). 따라서 본 구절의 개념은 어떤 경건한 의식이나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모든 문제 속에서 실제로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세움을 입어가도록 하라는 것이다. 즉 구체적으로 모든 문제 속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 24)는 원리에 준하여 교회 안에서 화평, 즉 덕을 도모하라는 촉구이다(고전 9:19-22, Calvin). 왜냐하면 로마 교회에서의 긴장은 신앙의 견해 차이로 인한 유대인과 이방 그리스도인간의 분열에 있었기 때문이다.

====14:20
성도들이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쓸 것을 말한 바울은 이제 덕을 세우는 일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함으로써 그의 논점을 강화한다(Harrison).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 '무너뜨리다'(* , 카탈뤼에)는 말은 바울이 앞절에서 사용한 '오이코도메오'(* , '집을 짓다', '덕을 세우다', '건설하다')의 반대말이다(마 5:17;24:2;26:61;27:40;고후 5:1;갈 2:18). 즉 바울은 비본질적인 음식물에 대한 이견(異見) 때문에 본질적인 하나님의 사업(일)을 파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세우라고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업'(* , 토 에르곤 투 데우)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 (1) 혹자는 하나님이 세우고 계신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Sanday, Barrett, Kasemann). (2) 구원사건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았다(Michel). (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연약한 형제, 즉 하나님이 갓 창조하기 시작한 사람 속에서 일으키는 구원 사역을 의미한다(Robertson, Murray). 여기서 (1)의 견해도 무난한 해석이라고 생각되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3)의 견해인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에 비추어 볼 때 13절 이하에서 계속해서 강한 자에게 교훈을 주면서 연약한 자가 근심케 되지 않기를, 그리고 그로 인해 망케 하지 말라고 권고하기 때문이며(15절) 나아가 하나님이 불러 구원하신 한 영혼이 장성(長成)하여 굳세게 서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주된 목표이기 때문이다(Carnfield, Barmby).
만물이 다 정하되(* , 판타 멘 카다라) - 14절을 반복한 교훈으로 강한 사람들의 슬로건처럼 보이는 이 말을(막 7:19;행 10:15;고전 8:4-8) 바울은 머저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음식물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깨끗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14절의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라는 말처럼 한정적 의미의 뜻이다. 즉, 인간의 생각, 욕구, 행위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피조 세계의 자원을 가리킨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 바울은 만물이 다 깨끗함을 인정하였지만 거기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음식물 자체는 그릇된 것이 없지만 만일 음식물을 먹는 습관이나 마음의 자세가 어떤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먹을지라도 나쁘다는 것이다(Bruce). 그러면 여기서 '거리낌으로 먹는'(* , 프로스콤마토스 에스디온티) 행위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 (1) 약한 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압력을 받아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고기를 먹는 행위를 말한다(Kasemann). (2) 형제의 연약함을 보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고기를 먹음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강한 자들의 무절제한 신앙 행위를 가리킨다(Calvin, Hodge). 우리는 여기서 원어의 의미상으로나 전후 문맥으로 보나 (1)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Chrysostom).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 이 구절은 권위있는 선언으로서 역시 강한 자들에게 계속되는 교훈이다(Murray). 바울은 여기서 강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이타적(利他的)인 행위를 극히 선하고 훌륭한 것으로 칭찬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여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악한 행위와 극히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아름다우니라'는 구절이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맨 뒤에 있으므로 강조가 약화되었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문장의 맨 초두에서 '칼론 토'(* ..., '...하는 것이 아름다우니라')라는 구문을 취하여 강한 자들이 연약한 형제를 생각하는 행위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전 7:1, 8, 26;히 13:9). '아름다우니라'의 헬라어 '칼론'(* )은 '선한', '보다 나은', '아주 고상한', '훌륭한', '뛰어난' 등의 뜻인 '칼로스'(* )의 목적격이다. 그러면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강한 자들의 지극히 훌륭한 일 즉, '칼론 토'(* )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 (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 메 파게인 크레아). 이것은 본장 2, 3, 6, 17절에서 말한 '먹는 것'(* , 브로시스)과 15, 20절에서 말한 '식물'(* , 브로마토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음식을 먹을 만한 신앙의 내적 확신을 갖고 있는 강한 그리스도인은 채소만을 먹는 약한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행동 반경을 넓게 할 수 있다. 즉 강한 그리스도인은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도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먹지 않을 자유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약한 믿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형제를 위해 연약한 자가 거리끼는 고기를 먹는 일을 삼간다는 것을 확실히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지 아니함이 영구하고 강력한 금욕(禁慾)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먹다'를 가리키는 '에스디오'(* )의 동사가 20절에서 현재형인 '에스디온티'(* , '먹는')로 사용된 후 바로 이어 본절에서 부정과거 '파게인'(* , '먹었다')으로 사용된데서 확인된다(Dunn). 그러므로 이것은 아직도 구약의 규례에 매여있는 연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잠시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약한 자들이 고기를 먹지 않음은 구약성경에 음식물과 관련된 각종 규제 사항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기를 못 먹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까) 적절한 방법으로 피를 빼지 않은 고기(창 9:4;신 12:15, 16). 다시 말해 고기를 그 피와 함께 먹는 것은 모세의 율법(레 19:26;신 12:23-25;15:23)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노아에게 행한 하나님의 명령(창 9:4)에 의해서도 금지되었다. (다) 부정한 동물의 고기(레 11:8;신 14:8). (따) 우상 제물의 고기(고전 8:13). 물론 고기를 먹는 그 자체를 율법에서 금하는 것은 아니었고(출 12:8;민 11:18) 다만 위의 금기 사항과 관련된 고기를 피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바울은 이런 규례를 아직도 준수하는 연약한 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강한 자들이 신앙의 자유의 행사를 절제(節制)하는 것이야말로 칭찬받을 만한 아름다운 행동임을 밝히고 있다(Harrison). 즉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위해서 그것을 먹지 않는 이타적인 행동을 요구한 것이다. (2)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 메데 피에인 오이논). 이는 '칼론 토' 구문의 두번째 용어로서 17절의 관용구 '브로시스 카이 포시스'(* ,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중에 '포시스'(* )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밝혀준다. 그러나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 자체는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에(신 7:13;11:14;막 14:23-25;요 2:1-11;딤전 5:23)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는 하나의 가상적인 실례로서 언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보다 개연성이 높은 해석은 모든 고기를 피하는(삼가는) 조심스러운 행위는 포도주까지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Dunn). 왜냐하면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이러한 행위들은 약한 자들이 자기를 지키는 실제적 관습이었기 때문이다(레 10:9, 10;겔 44:21;단 1:3-16;10:3). 그러므로 이것 역시 약한 자들 편에서의 금주(禁酒)가 아닌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의 금주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서 이런 행위야말로 참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3)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 메데 엔 호 호 아델포스 수 프로스콰테이). 이는 '칼론 토'(* )는 구문의 세번째 용어로서 연약한 자를 위하여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다는 원리에서 더 나아가 남에게 거리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니하는 것이 좋음을 시사한다(Godet). '거리끼게 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콰테이'(* )는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다' 혹은 9:32, 33에서처럼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다'는 용례로 사용되었다(Dunn).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약한 형제가 강한 형제의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목격하고서 마음에 상처를 받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강한 자들로부터 받는 압력에 굴복하여 스스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행함으로써 실제적으로 결국 걸려 넘어지는 결과를 초래함을 말한 것이다. 즉 강한 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약한 자들을 마침내 정상적인 신앙 생활에서 이탈되게 하여 그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임을 말한다(Calvin). 이것은 13절과 15절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요컨대 바울은 본절에서 말하는 그러한 종류의 일이 있을 때 자기가 가진 신앙의 확신과 내적 자유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외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른 그리스도인에게도 강요함으로써 동료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의 방해나 또는 파멸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면 그것이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확고한 내적 확인과 자유를 가지지 못한 자가 강한 자의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신앙 인격의 순수성 및 고결성이 상처를 받고 그 영혼의 상태가 상심케 되며 혼돈케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런 내적 확신과 내적 자유의 외적인 표현은 기꺼이 절제(節制)하고 단념해야 한다. 이러한 일이야말로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교훈이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를 안하는 것이 소극적인 자세라면 이에서 더 나아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열매를 맺어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17, 19절) 힘쓰는 것은 적극적 자세이다(Cranfield).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 이 구절은 일반적인 것으로 강한 자와 연약한 자 모두에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Robertson, Cranfield) 십중팔구 주로 강한 자들에게 주는 권고이다(Murray, Harrison, Calvin). 왜냐하면 자기의 확신에 따라 은밀히 행동할 것을 경고받은 자는 다름아닌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15, 20, 21절). 여기서 '네게 있는 믿음을'(* , 쉬 피스틴 헨 에케이스)이란 구절은 단순한 질술 이상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로서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 '는 질문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Godet, Meyer, Calvin) 또는 '피스틴'(* , '믿음') 뒤에 있는 관계대명사 '헨'(* , which)을 살려서 '너는 네가 가진 믿음을' 지키고 있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믿음'(* , 피스티스)이란, 강조 용법으로 표현된 '쉬'(* , '너', '당신', 여기서는 강한 자를 말함)가 가진 믿음으로서 구체적으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는 믿음을 말한 것이다(Calvin, Murray, Cranfield).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 카타 세아우톤 에케 에노피온)는 말은 네가 가진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에게 간직하고 있으라'는 말로서 '에코'(* , '가지다', '붙잡다', '소유하다')의 현재 명령법이 사용되었다. 이는 자신의 신앙의 확신과 자유를 즐기기 위해서 그것을 외적으로 함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오히려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隱密)한 일로서 자신의 내적 삶에서만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자의 자유권이 공공연하게 행사된다면 이는 연약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므로 이러한 자유권의 행사는 가능한 한 삼가야 하기 때문이다(Harrison). 즉 믿음의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그 믿음의 자유를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 구절은 자신이 행하는 일의 정당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복되다는 일반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양심이 무딘 그리스도인들도 복되다는 진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Cranfield). 이 선언은 앞 내용과 계속되는 것으로서 강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선언이다(Murray). 즉, 강한 그리스도인이 앞에서 계속 언급한 진리에 주의를 기울여(15, 20, 21절)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내적 자유의 외적 표현을 삼감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며(17절) 하나님의 사업을 세워가는 행위가(19절) 참으로 아름답고 복되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복이 있도다'(* , 마카리오스)는 미래의 어떤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특히 평화로운 양심의 현재적 상태를 말한다(Calvin, Murray, Godet). 왜냐하면 그는 전혀 의심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분열이 없으며, 더욱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행함으로써 자신을 책(責)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이 있도다'의 조건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한 자'여야 한다. 여기서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도키마제이'(* )로 자신을 '시험하다', '검토하다', '분석하다'(* , 도키마조)의 현재 능동형이다. 그리고 '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크리논'(* ) 역 시 '정죄하다', '심판하다'(* , 크리노)의 현재 능동형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 행위를 스스로 면밀히 검토하여 자신의 신앙 양심에 가책(呵責)이 없다면, 즉 자기가 확신하여 행동한 바에 대하여 전혀 갈등이 없는 상태를 소유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선언이다(Calvin, God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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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 이 구절은 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교훈으로서 앞절(22절)에 묘사된 강한 그리스도인과 대조를 이룬다(Murray).강한 형제가 가진 그 특별한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따라서 자기 행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심정으로 고기를 먹는다면 정죄(定罪)를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크리노메노스'(* )는 '주저하다'라는 뜻을 가진 '디아크리노'(* )의 복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진리의 말씀에 의한 확신이 없어 갈팡 질팡하면서 갈등하는 상태를 말한다(Calvin). 그리고 '정죄 되었나니'(* , 카타케크리타이)라는 말은 '심판하다', '정죄하다'의 뜻을 가진 '카타크리노'(* )의 완료 수동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죄되었다'는 말은 인간을 구원에서 배제하는 하나님의 미래 활동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그릇된 자로서 이미 정죄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Harrison).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 이 구절은 앞의 내용이 왜 그런가를 명확히 제시한다. 즉 의심하고 먹는 자가 정죄된 이유는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말해 그의 믿음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허락한다는 완벽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확신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위선적인 행동을 한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갈 2:11-14). 그는 확실히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고 따라서 바울의 책망을 들었을 때 항변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양심이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행동한 것이 필연적으로 정죄받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 , 피스티스)의 의미는 본절 후반절에 나오는 믿음의 의미와 같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 이는 본장의 결론적인 선언이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의 믿음을 뜻한다(Godet). (2) 선한 양심같은 그 무엇을 뜻한다(Sanday and Headlam). (3) 자기의 기독교적 신앙이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도록 그와 관련된 내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확신, 즉 말씀의 원리에서 깨달은 마음의 확신을 말한다(Cavlin, Murray). 위의 견해 중 세번째가 가장 무난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장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믿음(1, 2, 22, 23절)과 어울리는 유일한 해석이 (3)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3)의 견해는 실제적으로 부분적인 면에서 (1)과 (2)의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Robertson). 그리고 '죄니라'(* , 하마르티아 에스틴)는 말에서 '죄'를 가리키는 '하마르티아'(* )는 통상적인 용법과 다른 방향에서 사용되고 있다. 즉 '하마르티아'(* )가 본래적 의미로서 일반적, 보편적으로 죄의 개념을 뜻했다기보다는 개개의 죄악된 행위들을 염두에 둔 말로서 믿음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모든 일, 즉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내적 확신을 따라 행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이 어떤 일일지라도 죄가됨을 의미한다(Cranfield). 이렇게 하여 바울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의 차원을 넘어 성도의 모든 생활의 근본 원리를 선언함으로써 강한 자와 연약한 자를 향한 본장의 권면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