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15, 2010

빌립보서 3장 1절~ 11절(진정한구원의 길) 12절~21절(목표를 향한 달음질)

진정한 구원의 길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 '종말로'(* , 토 로이폰)는 대부분 '결론적으로', '마지막으로'로 번역되었다(KJV, JB, NIV, RSV). 그러나 이 단어가 서신서에서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경우는 극히 드물며(고후13:11), 오히려 새로운 주제를 소개하려고 할 때(살전 4:1;살후 3:1)많이 사용되었다.그러므로 본절의 '종말로'는 바울이 끝을 맺기 위해 사용했다기 보다는 새로운 주제를소개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이제는', '더 나아가서', '덧붙여서'라고 번역하는 것이타당하다(Goodspeed, Knox, Houlden, Moffatt). 한편 바울은 본 서신의 여러 곳에서'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다(1:18;4:4,10).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옥중에 있을 때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뻐하라'고 한 것은 기뻐함을 통해서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일치를 해소(解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는 성도들의 이러한 기쁨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가능한 것임을 시사한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같은 말'에 대한 해석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주 안에서 기뻐하라'를 가리킨다(Alford, Weiss, Moffatt). (2) 3,4장에서 언급된 교회내의 불일치에 대한 경고를 가리킨다(Lightfoot).(3)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이다(Zahn, Meyer, Scott, Vincent).이 세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1)은 문맥상 다음에 이어지는'너희에게 안전 하느니라'와 연결되어지지 않으며 (2)도 2절 이하에 기록된 거짓 교사의 경고와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복음에서 벗어난 사실들을 지적해주는 것이 아무리 지나치다고 할지라도 지루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3:2
본절은 유대주의를 따르고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유대주의를 강요하는 자들에 대해조심 하라는 권면이다.
개들을 삼가고 - '개들'은 길거리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덤벼드는 사나운 짐승을 가리키는 것으로(Lightfoot) 경멸스러운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했던 상징적 표현이다(신 23:18;삼상 17:43;잠 26:11;사 56:10,11). 예수께서도 이 말을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에게 사용하셨고(마 7:6) 이방인을 가리킬 때도 사용하셨다(마 15:26,27). 본문에서의 '개들'은 성도들을 괴롭히는 유대주의 행악자들을 지칭한다(Michael).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 '행악하는 자들'은 문자적으로 '악한 일꾼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고 율법을 행함 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이다.
손할례당을 삼가라 - '손할례당'의 헬라어 '텐 카타토멘'(* )은 문자적으로 '절단한자'를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인간적 노력의 산물인 의식적인 행위만 중요시하는 자로서 율법을 고수하였다.

=====3:3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 본절은 2절에서 경고한 내용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율법에 따른 행위만을 일삼는 유대주의자들은 진정한 할례당이 아니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이 진정한 할례당이다(롬 2:25-29;골 2:11). 바울은 진정한 할례당의 특징을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여 - '봉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트류온테스'(* )는 유대인들이 공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한 말이다(눅 2:37;행26:7;롬 9:4,TDNT). 진정한 할례당은 전통이나 형식에 지배받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시 51:17).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참할례당은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자들로서 모든 만족과 소망이 그리스도를통해서 나오는 것임을 아는 자들이다(갈 6:14).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 '육체' 에 해당하는 헬라어 '사르키'(* )는일반적으로 몸(눅 24:39), 인간의 성품(요 1:14), 타락한 본성(롬 7:5) 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Schweitzer, Muller). 본절의 '사르키'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것즉 인간의 의식(儀式)이나 공적 등을 가리킨다. 본절은 진정한 할례당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의(義)를 얻을 수 없는 의식과 자랑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함을 시사한다(Kent, Martin).

=====3:4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 사도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자신의 간증을 하고 있다. 그는 성령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육체를 자랑할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다. 바울이 육체를 자랑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육체를신뢰할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만이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확실한 진리이며, 그 어떤 것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Ridderbos).

=====3:5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육체를 신뢰할 만한 근거들을 제시한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으며(창 17:12;레 12:3),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는 성인이 되어서 할례를 받았다(행 16:3). 바울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난 지 십삼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이스마엘 족속과도 달랐다. 그는오로지 율법에 정한대로 난 지 팔 일만에 부모로부터 할례받은 진정한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얻은 선택된 언약의 백성임을 의미하며 '족속'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민족으로 하나님과 약속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거룩한 백성의 개념을 가지고있다(Lightfoot). 바울은 이방인에서 개종한 사람이 아니라 순수한 이스라엘태생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권리와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Hawthorne).
베냐민의 지파요 - 베냐민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아들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이 이지파였다(삼상 9:1,2). 하만의 음모(陰謀)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베냐민 지파였다. 또한 베냐민 지파는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다윗 왕조에 신실하게 충성하였으며 바벨론 포로때에는 성전 건축을 위해 유다와 레위 지파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느 11:7-9). 바울은 이런베냐민 지파에 속한 것을 매우 자랑하였으며(롬 11:1) 이 자랑을 통해서 자신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 순수한 유대인임을 밝히고있다(Hendriksen, Kent).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 본절은 바울 자신이 '아브라함의 씨'로서 이방인의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히브리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히브리인임을 밝히고 있다(Kent,Hawthorne). 그는 유대인 방식으로, 히브리말로써 양육을 받은 자였다(행 22:2,3, Mu-ller).그러므로 그는 혈통은 물론 히브리말과 히브리 관습을 그대로 보존한 순수한 히브리인이 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바리새파는 가장 엄격한 유대 종파로서 구약의 율법은물론 구전이나 서기관이 해석한 전승을 연구하며 따르는 자들이다(Hawthorne,Muller).바울은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나(행 23:6) 바리새파에 입문한 자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존경받는 선생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했다(행 22:3). 그러므로 그는 바리새인중에서 가장 신실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였다(Beare).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 다메섹 도상에서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바리새인으로서 예루살렘성 밖에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자였다(행 9:13,21).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었다. 한편 '율법의 의'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명령들과 기준들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의'를 의미한다. 바울은 이런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다른 사람이 볼 때 흠이 없었던 자였다. 그러나 바울이 지킨것은 율법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진정으로 요구하시는 영적 순종에는 미치지 못하였다(Kent).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 '무엇이든지'는 단지 앞의 구절(5, 6절)에서 언급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앞절들(5,6절)에서 언급한 바울이 신뢰할 만한 육체의 조건들은 다만 대표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본절의 '무엇이든지'는 바울 자신에게 이익이 되었던 모든 것을 가리킨다(Vincent, Kent). 바울은 유대교에서 자신의 외적인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었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부터 이전의 자랑거리가 이제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되고 말았다. 구원이 단지 예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과거에 구원을 얻을 조건이 되리라 생각했던 외적인 조건들이 해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길 뿐더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게마이'(* )는 완료 중간태로서 해로 여겼을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해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다.

=====3:8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 앞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헤구마이(* , '해로여김')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자신이 해로 여기고 있는 확신이 지속되고 있는것을 나타내며(Kent) '모든것'은 7절의 유익했던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것을 의미한다(Martin, Bonnard, Dibelius).'가장 고상함'의 헬라어 '휘페레콘'은 '탁월함'이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바울 자신이 가장 뛰어난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음을 의미한다. 한편 '내 주'는 그리스도와 바울 자신과의 친밀한 관계를나타낸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내가그를 위하여'라 함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위하여 지금까지 그가 귀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여기서모든 것을 잃어버린 때는 그의 회심의 때를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배설물'의 헬라어 '스퀴발라'(* )는 개에게 던지는것으로 '똥'이나 '음식 찌꺼기' 또는 '쓰레기'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후 그 이전의 삶 전체에 대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버렸는가를 시사한다(Hawtho-rn, Martin).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본절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재림의 날에 구원얻는 것을 나타낸다(Kent, Martin). '발견되리'는 앞절의 '그리스도를 얻고'와 동등하게 '히나'(* ,'...하기 위하여')에 연결된 목적절로서 '바울 사도가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이 발견되려'라는 의미이다(Vincent, Hawthorne).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긴밀한 연합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의를 힘입고 있음을 시사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 '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넨'(* )은 법정에서 사용된 용어로 두 부류 가운데서 한 쪽은 '옳다'고 인정하고 다른 한 쪽은 '정죄'할 때 사용되었다(Hawthorne).그러므로 본절은 믿음을 통하여 '의'를 얻으며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지 못한다는 의미로, 바울 자신이갖고 있는 의가 자신의 노력이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의해서 온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하나님께부터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은 오로지 십자가에서 죄를 속량하신 그리스도를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유일한 조건인 '믿음'은 '행위'와 반대되는 것으로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로는 '의'를 얻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Kent).

=====3:10
내가 그리스도와...알려 하여 - 8절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Kent).여기서 '알려하여'의 헬라어 '그노나이'(* )는지적지식 뿐 아니라 경험적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과거나 현재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알기를 원한다는 강한 의지를 시사한다.
그 부활의 권능 -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알기를 원했던 것 '그 부활의 권능'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이나 그리스도인이 죽음 이후 경험하게될 육체적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Muller) 부활하셔서 믿는 자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낸다. 이 부활의 권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살도록 한다(롬 6:4). 바울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서만 알기를 원치 않았다.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그의 개인적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했다(Hawthorne).
그 고난에 참예함 - 본문은 '부활의 권능'과 분리된 전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같은 경험의 또 다른 측면이다(Hawthorne). 이것 역시 단순히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내외적인 고난을 말하는 것으로(Kent),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골 1:24).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롬 8:17-18;고후 4:7-11).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본문은 앞서 언급한 '그 고난에 참예함'을 보다 직접적이고 심도있게 표현한 것이다(Muller). 이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에 참예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신의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고(롬 6:5,6;고전 15:31;갈 2:20), 그리스도의 새로운 부활의 생명으로 연합(聯合)하여 계속 성장해야 함을 시사한다(Kent).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어찌하든지...이르려 하노니'의 헬라어 '에이 포스 카탄테소'(* )는 부활에 대해다소 의심을 내포하는 듯하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바울이 부활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아니라 부활의 방법에 대해 의심한다고 주장한다(Lenski). 그러나 오히려 이것은 그의 깊은 겸손과 조심스런 바람의 표현으로서 자기 신념을 배제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L-ightfoot, Kent, Hawthorne, Hendriksen, Muller). 한편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엑사 나스타신 텐 에크 네크론'(* )은 신약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주 드문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의인과 죄인 모두의 부활을 나타낼 때는 '아나스타시스 톤 네크론'(* )을 사용한다. 이러한 일반적 표현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전치사 '에크'(* ,...로 부터')가 두번씩이나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 의인의 부활혹은 영광의 부활을 뜻하는 부분적인 부활로 보아야 한다(Kent, Muller, Hawtherne).즉 본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예하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같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될 영광의 부활을 시사한다(계 20:4-15).


목표를 향한 달음질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 본절은 바울이 이미 도달한 현재의 상태와 앞으로 도달하여야 할 목표 사이의 갈등을 나타낸다(Martin).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났던 것을 암시한다(Muller). 그는 그곳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다. 그의회심은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서(Robertson) 그가 열망하는 완전함에 이르기 위하여 믿음의 경주 즉 영적 성장을 향해 계속해서 달음질해야 한다. 여기서 '좇아가노라'로 번역된 헬라어 '디오코'(* )는 '추적한다'라는 의미로 사냥이나 달리기 경주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본절에서 '디오코'는 좀더 적극적이고 열심히 노력하는 강한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배우고 닮아가고자 하는 바울의 진지한 노력을 시사한다.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목적을 계속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자각시키고 있다.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본절은 앞절의 반복이다. 바울이 자신의 과거에 집착(執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나아감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빌립보 교인들 가운데 행위와 의식을 강조하며 자신들이받은 영적 은혜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극단적 완전주의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인 듯하다(Kent). 본문의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는 바울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일관된 삶의 자세를 나타낸다. 여기서 '잊어버리고'의 헬라어 '에필란다노메노스'(* )는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관심을 빼앗아 진보를 방해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에필란다노메노스'를 통해서전에 지녔던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루어 놓은 업적들로 인해서믿음의 경주를 방해받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앞에 있는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목적을 잡기위하여 전력을 다해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고 있다(Martin).

=====3:14
푯대를 향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스코폰'(* )은 문자적으로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라는 의미이다. 이는 경주자가 달려가고 있는 경주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바울이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히12:1,2)만을 바라보고 경주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삶의 여정 속에서 자신들의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고 그를 향하여 전진하여야 함을 시사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위에서 부르신 부름'은 경주의 승리자에게 상을 주기 위해 심판관 앞에있는 높은 단으로 올라오도록 명하는 것에서 연유된 표현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부르심을 의미하며(고전 1:26;7:20;엡 1:18;4:1,4;살후 1:11) '상'은 경주 뒤에 있을 영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시사한다.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 '온전히'의 헬라어 '텔레이오이'(* )는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치 않은 절대적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연약과 무지에 비하여 꽤 성장한 상대적 완전으로서 더 높은 목표를 향한 노력의 여지가 아직도 남아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전 2:6;14:20;엡4:13;골 1:28;4:12, NIV, KJV, Kent, Vincent).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소속되었고 하나님께로 구별되어서 '온전히 이룬 자'가 되었으나 아직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分量)까지 성숙해가야 한다(Muller).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바울은 자신이 생각하는 '온전'에 대해 혹시나 빌립보 교인들 중에 반대가 있거나 다른 생각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리라고 확신한다(Martin, Kent).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동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라도 그 성숙의 정도가 서로 차이가있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 영적 성장을 이루어가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히 6:11,12). '그대로 행할 것이라'의 헬라어 '토 아우토 스토이케인'(* ) 중 동사 '스토이케인'은 '보조를 마추라', '일치하여 행하라'는의미를 가지고 있다(갈 6:16). 바울은 '스토이케인'을 사용해서 다시 한번 성도들 상호간에 성숙과 의견의 차이가 존개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와 협력을 이루어 나갈것을 일깨우고 있다(Hawthorne, Kent).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이(고전11:1) 빌립보 교인들이 따라야 할 모델로서 자신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의 이와같은 권면은 자기를 자랑하는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Kent).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의 헌신에 대하여 모델을 통한 실제적인 교훈이 필요하였고, 바울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구체적인 모델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하고있다(7-16절;고전 11:1, Hendriksen).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만을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암시한다(2:25,29,Muller, Hendriksen).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은 물론 다른 동역자들의 삶을 빌립보 교인들이 배우기를 권면한다.

=====3:18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고 율법의 규범을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로서 2절에 언급된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enski, Muller, Barth, Hawthorne). (2) 혹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왜곡하여 율법의 모든 금지 조항을 부정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ightfoot, Kennedy, Beare).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죄를 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왜곡(歪曲)하여 참자유가 아닌 방종을 일삼는 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Kent).

=====3:19
본절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 대한 설명이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 '멸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레이아'(* )는 '구원' (* , 소테리아)의 반대 개념이다. 이는 특별히 사악한 자들에 대한 형벌로서 영원한 파멸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마 7:13;벧후 3:7;계 17:8).'십자가의 원수'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될수 없으며 육신의 욕망에 빠져 있기에 영원한형벌을 받게 된다.
저희의 신은 배요 - 본문은 쾌락주의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Muller, Kent), 육체의 정욕대로 사는 것을 시사한다(롬 16:18;고전 6:13;유 1:11).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 '부끄러움'의 헬라어 '아이스퀴네'(* )는 '벌거벗음'(nakedness), 또는 '사람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킬때 사용되는단어이다(Hawthorne). 따라서 본문은 '저희'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부도덕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즐겼음을 시사한다(엡 5:12).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 -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일'에 관심을 두는 반면(20절, 요3:12)이들은 '땅의 일' 즉 본능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세상적 가치 기준을따라 행동한다(Muller, Kent).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 본절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된 자들과반대되는 참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나타낸다. 빌립보 시민들이 비록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로마 제국에 속해 있어서 로마의 시민으로서 특권을 누리는 것처럼 빌립보 교인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히 11:13;벧전 2:11)처럼 산다할지라도 하늘에 소속된 시민이다(Martin, Kent, Calvin).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비록 지금은 지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므로 하늘나라 시민 으로서 합당한 모든 책임과 의무를 기뻐하여야 함을 권면한다(Hawthorne).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 '거기로서'가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혹자는 '시민권'(Martin), 혹자는 '하늘'(Muller, Moffatt)이라고 주장하나, 두 가지를 모두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Kent).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연고지가 하늘이기 때문에 모든 관심사가 하늘에 있으며 진정한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롬 8:21-23). 왜냐하면 그의 재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는 온전한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Muller).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임할 온전한 구원의 모습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 그리스도인의 몸은 '낮은 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으로 완전히 변화된다.여기서 '낮은 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갖고 있는 현재의 몸으로서 죄짓기 쉬운 욕망, 죽음, 질병, 고난등에 대해 무방비한 상태로 놓여 있는 육체의 연약성을 시사한다(Kent).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현재의 썩어질 몸을, 당신이 부활하실실 때 입으신 '영광의 몸' 즉 '썩지 아니할 몸', '신령한 몸' 으로(고전 15:42-44) 변화시키실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 곧 '그리스도'의 역사로 이루어진다.'역사'(役事) 의 헬라어 '에네르게이안'(* )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리킨다(Muller, Kent). 그리스도는 온 우주와 원수들,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초자연적이며 주권적인 능력을 가지시기에 마지막날 성도들을완전히 구원하실 것이다.

Thursday, February 4, 2010

요한일서 4장 1절~6절(성령과악령)7절~21절(하나님은 사랑이시다)

====4:1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저자 요한이 진술하고자 하는 주체로 수신자들의 관심을 전환시키기 위한 호칭이다. 요한은 본절 외에도 이와 같은 표현을 본장에서 두 번 더 사용하여 수신자들의 관심을 야기시키고 있다(7,11절, Brooke).
영을 다 믿지말고. - '믿지 말고'의 헬라어 '메...피스듀에테'(* )는 '진실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말라'라는 의미이다. 이는 '시험하라'와 연결되어 모든 영을 대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잘 분별하여 받아들여야 함을 시사한다.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 '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타'(* )는 복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나 악한 자의 영이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에 언급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가리킨다(Marshall). 한편 '시험하라'는 기준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을 가리킨다(Stott).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바울에 따르면 영들을 시험하여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특별한 은사이다(고전12:10).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하는 분별력을 가리킨다(Westcott). 요한은 당시 수신자들 사이에 스스로 영감을 받았다고 자장하던 이단자들을 염두에 두고 수신자들이 이들을 시험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함으로 무조건 따르지 말것을 권면하고 있다.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 본문은 수신자들이 영들을 시험해야 할 이유이다. '거짓 선지자'는 신약성경에서 '진실한 선지자'를 대적하는 자나(눅6:26; 벧후2:1), 혹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도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마7:15; 24:11,24; 행13:6).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은 종말론적 현상이다(2:18; 막13:22, Barker).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그리스도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이나 교리로 미혹하는 자들로서(마24:11; 살후2:3; 계20:10)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유혹한다.
====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 '하나님의 영'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13절; 3:24, Stott).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증거 하심을 의미한다. (2)혹자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JB, Smalley). 이들은 본절이 앞절과 연관되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나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나은 듯하다. 한편 '알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스케테'(* )에 대해서 혹자는 명령법으로 해석하나(Law), 본서 어디에서도 명령법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Westcott, Smalley, Brooke). 요한은 본문네서 수신자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신자들이 알고 경험했던 영적인 사실들을 잘 지키며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상기시키고 있다(13절; 3:16; 5:2)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본문은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거짓 영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의 인정 여부이다. 요한 당시 수신자들 가운데에는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에 빠져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공동서신 개론의 "공동서신의 이단 사상" 참조). 요한은 본절에서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를 공격하고 있다. 한편 '오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렐뤼도타'(* )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요이1:7에서 현재 시상으로 사용된 것과 대조를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이 영원한 사실이며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시사한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다(1:1,2; 3:1; 5:1; 요1:12-14, Westcott).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한다. 즉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이셨다(Marshall, Smalley).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 비록 '육체로 오신'이 생략되어 있다 할지라도 본문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반대로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고 거짓 영에게 지배를 당하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참된 성령의 도움으로 성육신을 시인하는 것과 거짓 영의 지배를 받아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절대로 중간 지대란 있을 수 없다(Law). 오직 양극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토 투 안티크리스투'(* )는 헬라어 어순상 앞절의 '토 프뉴마 투 데우'(* , '하나님의 영')와 대조를 이루어 '프뉴마'(* , '영')가 생략되어 있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토 투 안티크리스투'가 거짓 영을 의미하나(Law) 문맥상 본문은 거짓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들, 즉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세상에 오심을 부인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은 사단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 '이제 벌써'는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들이 종말에 출현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했고(2:18) '이제 벌써'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함을 밝힘으로 종말의 긴박성을 암시하고 있다(Smalley). 한편 '세상에'는 1-6절 사이에 무려 6번이나 나타나며 모두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세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며 통제하는 곳으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지칭한다.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 요한은 본문에서 다시 '자녀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수신자들이 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그들을 이기었음을 확신시키고 있다. '하나님께 속하였고'는 수신자들이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세상과 연합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기었나니'의 헬라어 '네니케카테'(* )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승리가 과거에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효과가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Houlden). 이 승리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리가 거짓임이 판명되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본서에서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승리는 지식적인 면에서 거짓된 교리에 대한 분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통해서 거짓된 교리를 정복하고 있음을 시사한다(Smalley).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된 교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수신자들이 세상을 이긴 이유이다. '너희 안에 계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엔 휘민'(* )에서 '이'를 의미하는 '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3:20, Haas). (2)혹자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2:14; 3:24; 요14:20,23, Westcott). (3)혹자는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6절; 2:20,27; 요14:16,17; 16:13-15, Stott, Houlden). 이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가운데 역사하셔서 사단의 영향력 하에서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게 되며 그 결과로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있는 이'는 사단이나 악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2:13,14; 3:12; 5:18,19) 그는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아니하고 세상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며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오직 세상에 속한 자들에 한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그 세력을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단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루셨으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그 승리에 동참하기 때문이다(6절; 요16:33; 롬8:31, Stott, Calvin).

====4:5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 '저희'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훈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킨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속한 고로'의 헬라어 '에크 투 코스무'(* )에서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서 비롯되었으며 세상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임을 시사한다. 또한 '세상'을 지칭하는 '코스무'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복음과 반대되는 사상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주장하던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상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2)그러한 사상에 미혹된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치되는 당시 사상에 탐닉했고 그것에 빠져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려 했다.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 요한은 4절까지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수신자들만을 지칭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에 대해 혹자는 사도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Brooke)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Haas, Schnackenburg). 왜냐하면 이미 수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4절).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 '우리의 말을 듣고'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콘'(* )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친 거짓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지식을 가리킨다. 더욱이 본절의 '아는'은 현재 시상으로 그 지식이 지속적이며 성장하는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우리의 말'은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 즉 처음부터 있었던 말씀을 가리킨다(2:7, 24; 3:11; 요이1:5,9).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부인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마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진리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요14:17; 15:26; 16:13, Marshall, Stott). (2)혹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Dodd, Haas).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 진술해 온 것으로 보아 후자가 보다 적합한 듯하다. 한편 '미혹의 영'은 '진리의 영'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이것 역시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단의 지배 하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 복음을 청송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 '사랑하는 자들아'는 본서에서 6번 나타난다(1,11절; 2:7; 3:2,21). 이 호칭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도로서 수신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서로 사랑해야 함을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사랑하자'의 헬라어 '아가포멘'(* )은 현재 시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의 요구임을 시사한다. 이 명령은 예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3:11; 요13:14-17,35).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 본문은 다음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와 연결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근거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는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의 근원으로서 그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셨다(Westcott, Marshall, Barker).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 )는 사랑하라는 명령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혹자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나(Bultmann) 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Schnackenburg, Smalley). 한편 이러한 사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행위를 내포한다(3:18).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녀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낸다(Law). 곧 행위를 동반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내는 기준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메 아가폰'(* )에는 앞절의 '사랑하는 자마다'(* , 파스 호 아가폰)에 삽입되어 있는 '파스'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파스'가 생략된 것은 본절의 사랑이 개인적인 권면을 가리키는 앞 절과는 달리 일반적인 의미임을 암시한다(Smalley). 한편 '알지'의 헬라어 '에그노'(* )는 부정 과거로 현재 시상을 사용한 앞절의 '기노스케이'(* , '알고')와 대조를 이룬다. '기노스케이'가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본절의 '에그노'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을 전혀 알거나 경험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Marshall). 사랑하는 자가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자는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앞절과의 대조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본문은 7절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보다 더 발전된 표현이다. 요한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랑의 근원이심을 밝힌데 이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선언한다. 즉 이것은 사랑이 하나님의 모든 행위들 중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사랑임을 시사한다. 요한은 본서에서 사랑을 언급할 때 행위와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한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나 사실상 그들의 삶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사랑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 '우리에게'로 번역된 헬라어 '엔 헤민'(* )에 대한 해석은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 사이에'(among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Stott). (2)혹자는 '우리 안에'(in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Westcott). (3)혹자는 '우리게게'(to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4)혹자는 '우리를 위하여'(for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Barker). 한편 '나타난 바 되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네로데'(* )는 '파네로오'(* , '나타내다')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요한은 '파네로오'를 예수의 사역(1:2; 3:5,8),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심(요21:1,14), 그리고 예수의 강림(2:28)에 사용하고 있다. 본절에서 사용된 부정 과거 '네파네로데'는 명확한 역사적 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음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성육신을 가리킨다(Law, Smalley). 요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현시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 '독생자'의 헬라어 '모노게네'(* )는 히브리어 '야히드'(* )를 번역한 것이다. '야히드'는 70인역에서 두 가지로 번역된다. (1)'사랑하는'(beloved)을 의미한다. (2)'유일한'(uni- que)을 의미한다. 본절에서의 '모노게네'도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들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보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스탈켄'(* )은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사건이 지속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사랑을 증거하신다.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 본문은 '히나'(* , '위하여')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나타낸다. '살리려 하심이라'는 인간이 전에 '죽은 상태'임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시고 이루심으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하셨다(3:14).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 '여기 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 에스틴'(* )은 앞서 기술된 내용, 즉 9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3:16). 한편 '우리가...사랑한 것'(* , 에가페카멘)는 부정 과거 시상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는 시상의 변화가 있다. '에가페카멘'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결코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에가페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적인 특별한 사건에 의해서 나타났음을 시사하는데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9절). 요한은 이러한 시상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사랑이 지속적이지 않아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Law, Smalley). 반면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되어 사랑의 궁극적인 기원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다(Hou- lden).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본문은 앞 절의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와 병행을 이룬다. 9절에서의 '보내심'(* , 아페스탈켄)은 완료 시상인 반면에 본절의 '보내셨음이니라'(* , 아페스테일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부정 과거 시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구현된 특별한 속죄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화목제'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몬'(* )은 본래 '달래는 것'(propitiation)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의미는 단순히 성난자를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속죄(expiation)를 전제로 한다(Dodd, Westcott).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속죄함이 없이는 죄로 인해 형성된 하나님과의 소원한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본절의 '힐라스몬'은 '속죄'(expiation)의 의미와 '화목'(Propitiation)의 의미 둘 다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제로 보내심으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9절, Barker, Stott).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 '이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는 9,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시된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고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한편 '하셨은즉'의 헬라어 '에이'(* )는 사실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이유나 근거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이 이후에 언급되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께서 주신 계명으로(요13:34,35; 15:12,17)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요한의 이 권면은 당시 사랑의 계명을 평가절하하는 이단적 교리가 수신자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Smalley). 한편 '마땅하도다'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로멘'(* )은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시사한다. 물론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 사항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실천 행위이다.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본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유대적인 사상으로(출33:20,23; 신4:12)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본문에 대해 혹자는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그러나 그렇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은 수신자들 사이에서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기 때문이다(Schnackenburg, Barker). 영지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아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한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대하면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사랑의 계명을 연결시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그리스도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라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14절; 1:1-3; 요1:18; 12:45; 14:9; 17:24).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 요한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았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격하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비록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행함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품 속에 독생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사랑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자신들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 '거하시고'의 헬라어 '메네이'(* )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간의 지속적인 친근한 관계를 나타낸다(요15:1-10). 하나님의 내주와 깊은 관계를 나타내는 '메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내주와 지속적인 관계로 인해서 이루어 진다(Stott). 즉 하나님의 내주와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랑의 행위의 근거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 안에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 '그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아우투'(* )에 대한 이해는 그 안에 나타난 속격과 관련하여 세 가지가 가능하다. (1)혹자는 주격적 속격으로 이해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Brooke, Wengst). (2)혹자는 목적격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odd, Lewis). (3)혹자는 속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Schnackenburg, Law). 이러한 세 가지 해석은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온전히 이루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테텔레이오메네'(* )는 완료 시상으로 지속적인 성취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랑의 성취에 대한 요한의 주장은 2:5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요한은 2:5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임을 암시한다(Smalley).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을 통해서, 즉 인간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Barker, Westcott, Stott).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는 '호티'(* , '왜냐하면')로 시작하는 절로서 본문 하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의 근거가 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1-3절; 고전12:3).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한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여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즉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할 수 있도록 내적인 증거를 제시한다(3:24). 한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내는 '거하고'(* , 메노멘)와 '아느니라'(* , 기노스코멘)는 현재 시상이다. 이 현재 시상은 믿는 자가 경험한 내주의 확신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요한이 '기노스코멘'을 사용한 것은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성령을 공유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며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교제함으로써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한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이러한 교제, 즉 상호간의 내주(內住)는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을 가리킨다(3:24; 요3:5,6; 갈5:6).

=====4: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 아들의 칭호인 '구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테라'(* )는 예수께서 승귀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2:22,23) 사람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음을 시사한다. 이 역시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그들은 구원을 신비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죄보다는 무지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육체로 오신 예수께서 구주이시며 그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를 사함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언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있다(2,10절; 1:7; 2:2; 5:6, Schnackenburg). 한편 '보내신'의 헬라어 '아페스탈켄'(* )은 9절과 같이 완료 시상이다. 이는 과거에 아들을 보내신 성육신 사건과 그의 구속 사역의 효력이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Stott).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을 직접 지켜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ooke, Schnackenburg, Wengst). (2)혹자는 기본적으로 사도들을 의미하며 그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Westcott). (3)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애를 지켜 본 목격자들과 연합한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Dodd). 이와 같이 '우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할지라도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보았고'(* , 테데아메다)는 완료 시상이며 '증거하노니'(* , 마르튀루멘)는 현재 시상이다. 비록 둘 사이에 시상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과거에 보고 응답한 믿음과 현재에 그 믿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연속적이며 지속적인 효과를 시사한다. 성령을 수여받은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12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되신 예수를 알게되며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 깊이를 더해 갈 뿐만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요15:26).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 '누구든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가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신들만이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단 하나의 전제 조건,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기만 하면 누구나 예외없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한다. 한편 '시인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세'(* )는 부정 과거이다. 영역 성경에서는 이 과거 시상을 표현하기 어려워 두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1)미래 시상으로 번역한다(shall confess, KJV). (2)현재 시상으로 번역한다(acknowledges, NIV, NEB; confess, RSV). 그러나 본문의 '호몰로게세'는 미래 시상이나 현재 시상이라기 보다는 비록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을지라도 공적으로 고백하는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봄이 훨씬 더 타당하다(Stott, Smalley).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의 내주를 가능하게 하는 믿음과 순종의 고백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13절).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 본문은 13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처럼 상호간의 내주도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고 확신하게 된다(3:1,2).

=====4:16
본절이 속한 단락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절이 11-15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본절부터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Marshall, Schnackenburg). (2)혹자는 앞절과 연결되어 11-16절까지 한 단락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Law, Stott, Bark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문맥상 13,15절에서 언급된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진술이 본절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진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 '텐 아가펜 헨 에케이 호 데오스 엔 헤민'(* )은 문자적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사랑을'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 속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Law, Marshall, Westcott, Smalley). 한편 '알고 믿었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 카이페피스튜카멘'(* )은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사도들은 물론 모든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미 과거에 경험하여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알고 믿고 있음을 시사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확신할 수 있다. 요한은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황홀경이나 특별한 지식에 의해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한 것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의지하는 믿음에 달려있음을 선포하고 있다(9,10,14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본문은 8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주장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는 자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속성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 본문은 13,15절에서 전술된 바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보다 발전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며(13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때 성취된다(15절).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나타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의 삶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Smalley, Dodd).

=====4:17
이로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 )가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문 다음에 언급되는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2)혹자는 16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Marshall).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본문은 앞절과 이어지는 단락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 '사랑'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2)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tott). (3)혹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aas). (4)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Houlden). 이러한 네 가지 견해 중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안'(* )은 2:5에서 온전히 성취된 사랑과 연결되어 '순종'으로 묘사되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담대함이 믿음과 결과로 나타난다(요3:18; 5:24). 이러한 사실은 사랑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지속적인 내주를 이루며, 그 내주로 말미암아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됨을 시사한다. 즉,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이룬다(Smalley, Westcott).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호티 카도스 에케이노스 에스틴 카이 헤메이스 에스멘 엔 토 코스모 투토). - 이는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그가 어떠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1)예수의 영원한 순수성, 사랑, 의로우심,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의미한다(Brooke, Westcott, Haas). (2)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유혹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교제를 나누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할 것을 암시한다(Barker, Smalley, Stott).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 )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한다(행9:31; 롬3:18; 고후5:11; 7:1; 엡5:21). 그러나 본절에서의 '포보스'는 앞절의 담대함의 반대 개념으로 노예가 갖는 두려움을 가리킨다(요19:38; 20:19; 롬8:15). 이러한 '포보스'는 사랑과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전혀 두려움이 없이 담대해질 수 있다. 비록 죄는 두려움을 유발시킬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을 소유한 자들에게 사랑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본문은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형벌'에 대해서 혹자는 마지막 날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정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며(Schnackenburg), 혹자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는 고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Bultmann).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Haas, Marshall). 즉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사랑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게 되며 그 결과 마지막 날에 죄로 인한 정죄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갖는 담대함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반의 접속사인 '데'(*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데'는 본문이 17절 상반절의 내용, 즉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하나님의 사랑'을 역으로 진술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로 인하여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Westcott, Law). 그러기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었다. 이와 반대로 만약 누구든지 담대함이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그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성취하지 못한 자이다.

=====4:19
요한은 10절을 반복하여 진술함으로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사랑의 원리에서 출발하여 20,21절에서 형제 사랑의 문제로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 )은 문자적으로 '우리가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목적어가 없다. 목적어의 부재로 인해 '사랑'의 대상인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tott, Houlden). 이들은 앞절의 진술과 연결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2)혹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이들은 20,21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된 것과 연결시켜 해석한다. (3)혹자는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전후 문맥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어느 하나를 제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본문은 이유를 나타내는 '호티'(* , '왜냐하면')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근거를 나타낸다. '사랑하셨음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가페센'(* )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시상은 전순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을 가리킨다(9,10절, Law, Smalley).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의 삶은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 '누구든지'의 헬라어 '에안 티스'(* )는 본서에서 거짓 이단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 방법이다(1:6,8,10; 2:4,9). 본문 역시 수신자 공동체 내에 팽배해 있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공동체 내에서 신비한 지식을 통해 구원을 받고 다른 일원보다 우월하다는 환상에 빠져 타인을 돌보지 않았다. 요한은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반드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게 됨을 강조한다. 여기서 '형제'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교회 밖의 일반적인 사람들 전체를 가리킨다(7,11,19절). 즉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만을 향한 것이며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거짓말하는 자니'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Barker, Smalley). (1)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자며, 그 진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자이다. (2)거짓말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임을 드러낸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자들이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문이 상반절에서 언급된 '거짓말하는 자'의 근거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거짓말쟁이인 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서 표현된다(12절). 즉 그리스도인은 타인에 대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타인을 사랑하게 된다.

=====4:21
본절의 헬라어 본문은 '카이'(* , '그리고')로 시작하여 본절이 20절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 요한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Stott).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반영한 것으로(막12:29-31) 요한은 이 계명에 대해 본서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으로 진술하고 있다(3:23; 요이1:5,6). 한편 '주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 아우투'(* )는 문자적으로 '그로부터'라는 의미이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illiams, Stott, Westcott). (2)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며 상호보완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