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anuary 28, 2010

로마서 14장 1절 ~ 23절(형제를 심판하지 말라)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 톤 데 아스데눈타테 피스테이) - 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접속사 '데'(* , '한편')는 12:1-15:13에 이르기까지의 대 문단 내의 새로운 소 단락으로서 새로이 주제가 전환됨을 표시해 준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말은 4:19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상기시켜 준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본절의 '연역한 자'(* , 아스데눈타)란 말과 4:19의 믿음이 '약하여 지지'(* , 아스데네사스)란 말이 모두 '약하다'를 의미하는 '아스데네오'(* )의 변화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서 살펴볼 때 즉 4:19의 '약하여지다'는 여기 본문의 구절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4:19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약화, 다시 말해서 불리한 환경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지 못한 행위를 의미하지만, 본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원의 근본 원리로서의 '믿음'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고전 8:7, 9, 10;9:22의 '아스데네스'(* , '약한')나 고전 8:11, 12의 '아스데네오'(* , '약하다')를 통해 알 수 있는 성격의 약함이다. 즉 본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연약성은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의 연약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 확신이 약하다는 뜻이다(Sanday and Headlam).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볼 때 '믿음이 연약한 자'란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8:26). 그런데 본절의 경우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떤 날을 예배일로 지켜야 되는지에 관한율법 사항들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즉 교회 내부의 유대적 요소를 지키기를 주장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런 자들은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할 자유를 지각(知覺)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Calvin, Harrison).
너희가 받되(* , 프로슬람바네스데) - 이 단어는 '받아 들이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친절하게 대하다'를 가리키는 '프로슬람바노'(* )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너희들이 받아 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의 대상이 되는 '너희들'은 대체적으로 '강한 자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강한 자들은 음식물에 관한 이전의 구약성경의 규례를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거부하고 또한 어떤 특정 음식을 피하는 일에서 자유로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즉, 자신들의 동아리 안에 그들을 받아 들이고 동시에 그들을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교제하며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들로서 따뜻하게 인정해야 했다. 또한 이 단어는 공동체 전체 안에서의 공식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교제에서 형제로서의 용납을 의미한다(Kasemann). 그런 의미에서 '프로슬람바노'는 행 18:27과 28:2에서도 같은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 속에서 우러 나오는 환영을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welcome;RSV, LB).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바울은 여기서 연약한 자를 받을 때 특별히 주의할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는 성향이 있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약한 자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생각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강한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연약한 형제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으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열등감이나 결함, 혹은 색다름을 느끼지 않도록 그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베푸는 일뿐이다. 여기서 '비판'을 가리키는 '디아크리세이스'(* )는 '다툼', '구분', '판단', '결정', '논쟁'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며 '의심'을 가리키는 '디알로기스몬'(* )은 '추론', '생각', '의견', '거리낌', '주저함'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디아크리세이스'는 '비판', 혹은 '판단'이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고 '디알로기스몬'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거리낌'인 듯하다(Cranfield). 즉, 약한 형제가 꺼려하는 일들을 비판 내지는 판단함으로써 그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 조건을 도입한 것이다. 아울러 이 구절은 강한 자들이 누리는 내적 자유에 대한 외적 표현을 약한 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Sanday and Headlam).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 음식물에 관한 금기(禁忌)가 바울 당시에는 흔히 있었다. 유대적 전통(레 11:1-47)도 있었고 생명있는 것을 꺼린다는 당시의 통념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다. 물론 고대에는 식물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이 아직 발전되지 않았다. 또한 금욕 생활을 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음식을 절제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시대적 경향들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조하는 자도 있었고 그렇지 않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 있는'(* , 피스튜에이)이란 말의 의미는 그 반대말 '연약한 자'(* , 아스데논)란 말에 의해 결정된다. 즉, 연약한 자와는 달리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다(Meyer, Godet). 바울 역시 믿는 자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이것이 바울의 기본 입장이었다(딤전 4:3, 4). 한편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음식물을 채소로 제한한다. 여기서 '채소를 먹느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라카나 에스디에이'(* )로서 육식과 정반대되는 채소만 먹는다는 뜻이다. 즉, 채소 외의 다른 것을 먹지 아니한다는 것이다(창 9:3;잠 15:17;Godet). 그들이 음식물에 대해 이 같은 태도를 취한 데에는 의도적으로 부정한 음식을 피한다는 종교적 이유(레 11장), 고기를 먹지 않으면 보다 건강하게 된다는 건강상의 이유, 그리고 살아있는 것을 먹기를 꺼려하는 의식적인 이유 등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연약한 자들의 이 같은 자기 제한(먹거나 안 먹거나 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신앙의 분량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12:3).

=====14:3
업신여기지 말고 - 바울은 믿음이 강한자와 약한 자가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위험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먼저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에 대해서 '업신여기지 말아야'(* , 메 여수데네이토)할 것을 명령한다. 여기서 이 용어는 '여수데네오'(* )의 현재 중간태 명령법으로 '업신여김', '멸시함'(contempt, NEB) '경멸함', '얕봄'(despise, KJV)의 의미로 쓰여졌다.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소심한 태도를 멸시하는 눈초리로 대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단절되고 말 것이다(Godet).
판단하지 말라 -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는 강한 자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라'(* , 메 크리네토)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를 언급하면서 '정죄'(* , 카타크리시스)라는 표현보다 '판단'(* , 크리네인)이란 단어를 쓴 것은 주로 강한 자들의 행위를 비판함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Lenski). 음식을 채소로만 제한하는 연약한 자들은 모든 음식을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믿음이 강한 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그들을 성급하게 판단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 이 말씀은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양쪽 다 언급한 것으로 특별히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좀더 강조점을 둔 것이다(Godet). 강한 자나 연약한 자는 결코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바울은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자든 연약한 자든 구별치 않고 양쪽 모두 자신과의 교제 관계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容納)하셨던 것이다(Robertson).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 사이에 서로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에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 조건 없이 그들 모두를 용납하셨던 하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Calvin).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 바울은 위와 같은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 하인과 주인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반문의 형식은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 즉 먹는 자와 먹지 못하는 자를 엄히 질책(質責)하고 있는 것이다. 집 주인을 제쳐두고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하는 하인이 있다면 그 같은 행동은 주인의 영역을 월권(越權)하는 행동이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주인 앞에서 정당화 될 수 없다(Harrison). 하인들의 행위는 오직 주인만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인들의 행위는 주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하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둘로스'(* , '노예')가 아니라 '오이케텐'(* , '가사를 돌보는 머슴')이다(Bruce).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 바울은 계속해서 종의 행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그를 세운 주인에게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 , 퀴리오스)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집 주인이다(Godet). 그는 그의 집 하인들을 다스릴 '권능'이 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테이'(* )는 바울의 서신서에서만 발견되는 동사(고후 9:8;13:3)로 하인을 다스릴 수 있는 주인의 왕적 능력을 묘사하고 있다(Dunn). 이 처럼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에게 있어서 멸시하고 판단하는 행위는 그를 세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판단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바울은 서로를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14:5
본절에서는 날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다루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일반적인 성향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종교적 의무와 관련하여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인류 사회가 길일(吉日)과 흉일(凶日)을 구분하여 날들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에 복음이 전하여졌을 때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분명히 있고, 비록 복음이 전해진 사회에서도 성도의 자유 문제와 연관지어서(갈 4:9ff.;골 2:16) 안식일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 '혹은...혹은...'(* ... ..., 호스멘...호스 데...)은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지시 대명사이다(Robertson). 본 구절은 사람들이 날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성향을 말하고 있는데, 어떤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다른 날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 헬라어 본문에는 '같게'(alike)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모든 역본들(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KJV, RSV, NASB, NIV, NEB)에서는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는 것을 감안하여 의미상 '같게'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모든 날을 같게 여긴다는 것은 모든 날들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Bruce). 이에 바울의 가르침대로 따른 자도 있었지만, 종교적 양심으로 인하여 따르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시키면서 '날'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 이는 다른 사람이나 종교적인 규례로부터 영향을 받지 말고 주체적인 신앙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모든 날이 주의 것이라고 가르치고,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자들은 이러한 자유함을 육체의 기회로 삼거나(갈 5:13), 또 어떤 이들은 이로 인해 걸림돌이 되었고(고전 8:9), 어떤 이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고 하는 것은 신앙은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결단할 것을 중요하게 여겨 무엇보다도 그 관계가 우선되어야지 다른 사람과의 결단이 그보다 우선되거나 중요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 흠정역(KJV)에는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해 중히 여기지 않으며'(and he that regardeth not the day, to the Lord he doth not regard it)라는 문구가 첨가되어 문맥에 어울리도록 했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바울이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추정해 보면, (1) 문맥상 생략해도 뜻이 통하는 것으로 여기고 구차하게 언급하지 않았거나, (2) 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논지는 앞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생략했거나, (3) 독자들이 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상태를 지적하여 날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주를 위해서라면 가능하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 여기서 '주를 위하여'(* , 퀴리오;'주에게')와 '하나님께 감사한다'(* , 유카리스 테이 토 데오)라는 문구가 반복되는데, 이는 사람들의 눈에 '약한 자'가 됐든지, '강한 자'가 됐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킨다(Harrison). 사도 바울은 먹는 것에 대해 자유로울 것을 가르치면서(딤전 4:3ff.), 이러한 문제로 교회가 나누어지거나, 헛된 논쟁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지금까지 언급하였던 음식과 날에 대한 로마 성도들의 태도를 일단 정리한다.

====14:7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 바울은 앞에서 음식 문제와 종교적으로 날짜를 지키는 문제 등 구체적으로 로마 교회 성도들의 두 가지 생활 영역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언급하였다(1-6절). 바울은 교회 생활 영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도들이 취해야 할 생활 원리들을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구분해서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성도들이 취해야 할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첫번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데이스 헤몬 헤아우토 제'(* )로 여기서 '헤아우토'(* , '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현세의 연락(宴樂)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취하는 '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바울의 신앙 고백이며(갈 2:20)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 이후 바울의 일관된 삶의 원리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불신자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욕심으로 점철(點綴)된 역사였다. 이러한 불신자의 삶의 세계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값으로 사신 바(고전 6:19, 20)되었고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기 때문이다(Calvin). 성도의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두번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데이스 헤아우토 아포드네스케이'(* )로 성도의 삶은 죽음도 자신에 의하여 주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예속된 것임을 나타낸다(Olshausen). 바울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주를 위해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0, 21)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삶의 원리들을 권면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주를 위한 일관된 일사 각오(一死覺悟)의 삶을 살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므로 얻는 확신에 근거하여 다른 성도들을 향한 권면에서도 성도의 삶의 원리를 근본적인 모든 문제의 해결점으로 선언한 것이다.

====14:8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바울은 본절에서 좀더 본질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내적인 삶의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도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Tholuck).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생(生)과 사(死)에 있어서 궁극적인 표준이 되신다(Hendriksen). 이 말씀은 앞절 '자기를 위하여 사는'(* , 헤아우토 제)과 대조되어 '투 퀴리우'(* , '주의 것')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린 값으로 산 것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도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거나 자신을 스스로 주장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전 6:19, 20)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왜, 음식과 절기의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생사(生死)의 문제까지 끌어올려 말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Lenski).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일상의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께 대한 믿음과 청지기적 사명으로 부터 출발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여야 한다(고전 10:31).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 이 말씀은 앞절에 대한 확증적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고 다시 살으심은 산 자의 주가 되기 위해서임을 말하는 것이다(Bruce). 서두에 '이를 위하여'(* , 에이스 투토)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 준다.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主)가 되시기 위하여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은(고전 15:3, 4;고후 5:15), 우주적인 만물에 대한 통치권과(Kasemann)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인생의 주권자가 되심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Calvin). 한편 '다시 살으셨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 에제센'(* )은 '그가 소생하셨다'란 뜻으로 죽음에서 일어나신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神性)과 구세주(救世主)로서의 예수님과 만물에 대한 그의 주권을 입증하는 것이다(Harrison). 또한 그것은 새로운 삶이 주를 위해서 예비되었으며 그의 성도에 대한 주권과 능력이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업신여기느뇨 - 바울은 앞서 3절에서의 책망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첫번째는 연약한 형제에 대한 언급이다. 즉, 채소만 먹는 자들이 고기를 먹는 자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판단하느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크리네이스'(* )로 의문문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책망에 대한 좀더 강한 어조이다. 연약한 형제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성숙하지 못한 신앙으로 믿음이 강한 자를 판단한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너희가 무슨 권리와 근거로 그들을 일방적으로 판단하는가 ?'하며 연약한 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도록 질문 형식으로 그들의 행위를 깨우치고 있다. 두번째는 믿음이 강한 자들에 대한 언급이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업신여겼다. 즉,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 고기도 먹고 채소도 먹는 자들이 채소만 먹는 자들을 업신여겼다. '업신여기느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여수데네이스'(* )로 강자가 약자를 멸시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책망하고 있다. 양자간에 이러한 태도는 결코 어느 쪽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모두 온당치 못한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 모두가 서로간에 판단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장래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여기서 '심판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마티'(* )는 운동 경기에서 심판이 서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장소에 있는 심판은 경기 도중에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보면 즉시로 그들의 자격을 박탈하여 정정당당하게 경기하도록 하며 승리한 자에게는 상을 주었다(고전 9:24-27). 따라서 각자는 그 날에 자기가 행한 대로 직고하며 선악간에 심판을 받을 것이니 남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는 행위를 삼가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11, 12절).

====14:11
기록되었으되(* , 게그랖타이 가르) - 이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은 혼합형으로서 사 45:23과 49:18을 결합시킨 것이다. 바울은 기억에 의존하여 두 구절을 무의식적으로 혼합 인용했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인용했을 것이다(Dunn). 아무튼 어느 방법이든 간에 구약성경의 권위있는 가르침을 인용하여 자기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 인용문 역시 앞절(10절)에서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를 엄하게 책망하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상기시킨 교훈에 대해 구약성경으로 인증(認證)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Hendriksen).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 , 조 에고, 레게이 퀴리오스) - 이 말은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민 14:28;사 49:18;렘 22:24, 46;겔 5:11;14:16;16:48;17:16;18:3;20:13), 반드시 성취될 중차대한 진리를 선언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주께서 중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요 3:3, 5, 11;5:19, 24,25)라는 규칙적인 관용구를 사용했던 것과 흡사하다.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 사 45:23의 문자적 인용이다. 다만 '여소몰로게세타이'(* , '자백하리라')와 '파사 글롯사'(* , '모든 혀')이 두 단어 순서가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준 이 예언의 말씀은(사 45:23) 여기서 구약성경의 원래의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 즉, 한 분이신 지고(至高)한 하나님의 최종적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최후 심판시에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무릎꿇고 인정할 것이다(사 45:21). 예컨대 남을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행위는(10절)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심판의 영역을 침해한 것이다. 따라서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우상 숭배의 올무에 빠지는 행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1:21-25). 그리고 '자백하다'(* , 여소몰로게오)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70인역(LXX)에서 '인정하다', '자백하다', '찬양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15:9;마 11:25;눅 10:21;Dunn). 이는 모든 사람이 최후에는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자백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내용에 대해 모든 인류가 주께 찬양하며 경배하고 복종하게 됨을 나타낸다. 즉,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판단하는 이방인들의 회심(悔心)을 암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 행위인 구원과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이 자기들이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방인들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의 회심이 이스라엘과 성경에 의해서 선포된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순종임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 안에서 서로 받을 것을 촉구한 것이다. 아울러 사 45:23의 인용문이 빌 2:10, 11에서는 부활하시고 승귀(昇歸)하신 그리스도의 신분과 역할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자백'을 말할 때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하나님께 자백하리로다', 즉 하나님의 심판에 적용되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주권과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자신의 통상적인 습관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4:12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 앞에 나온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끌어낸 권고적인 결론으로서 이것은 10절의 사상을 되풀이 한 것이다. 여기서는 각 단어가 매우 강조적인 것으로서 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Denney, Cranfield). '각인'(* , 헤카스토스)은 어느 쪽도 배제(排除)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즉 판단하는 자나 판단받는 자 양쪽 모두를 가리킨다. '자기 일을'(* , 페리 헤아우투)은 자기가 판단하는 형제의 일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해서 직고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께'(* , 토 데오)는 자기 파당이나 혹은 자기와 친밀한 동료에게가 아님을 강조한다. 즉,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을 다 아시되 사람 마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 직고해야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히 4:12, 13). '직고하리라'(* , 로곤 도세이)는 장부에 적힌 대로 세밀히 '보고하다', '회계하다', '계산하다'는 뜻으로 심판의 철저성을 나타낸다(요 3:17). 신약성경의 용례를 보면 마 12:36;눅 16:12;행 19:40;히 13:17;벧전 4:5 등에서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다고 하여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최후 계산(셈)을 면제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2:6-16;고전 3:12-15;고후 5:10)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예외없이 각각 자기가 행한 일을 하나님 앞에서 자백할 뿐만 아니라 계산해야 한다는 진리를 각 단어마다('각인',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강조하여 선언한 것이다.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 이것은 앞 단락의 권면을 간결히 요약한 것이다. 또한 이 부분은 10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에서 끌어낸 결론으로서 이제 더 이상 서로 판단(비판)하는 습관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권면은 강한 자와 약한 자, 양 집단 모두에게 주어진 교훈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Godet, Dunn, Althaus, Gaugler, Cranfield). 마 7:1과 그 병행구에 나타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에 이 본문이 의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Dunn).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이것은 특별히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이다(Murray, Cranfield, Godet). 사람의 행동이 형제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특히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다(Cranfield, Godet, Murray). 예컨대 바울은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즉 바울은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할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비록 바울이 믿음이 강한 형제라고 직접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형제 앞에 거치는 것을 놓치 말라는 이 훈계에서 믿음이 강한 형제를 염두에 두었음이 틀림없다. 바울은 앞에서도 믿음이 강한 형제들에게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말라고 경계한 바 있다(3, 10절). 이제 본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연약한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주의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부딪힐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콤마'(* )는 글자 그대로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지게까지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stumbling block;KJV, RSV). 그리고 '거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론'(* )은 어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마련된 장애물 또는 덫(obstacle;NIV)을 뜻한다(Meyer, Murray). 즉 이 용어는 죄로 끌어 들이기 위해 유혹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묘사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의 십자가 지는 것을 만류하려 했을 때 '스칸달론'을 베드로에게 사용했었다(마 16:23). 그리고 이 두 용어는(프로스콤마, 스칸달론) 의도적으로 형제를 꾀어 그에게 죄가 되는 것을 행하도록 유혹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경고로서 사용된 것이라 하겠다. 비록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동기가 한 형제를 '연약한 자'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순수한 열망에 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본절에서 믿음이 강한 성도들에게 촉구하는 것은 (1) 그들이 다른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것과 (2) 다른 형제들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의 훈계는 강한 자들의 어떤 행동이 다른 성도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도 있고 근심되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강한 자들이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그 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일을 한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 ?'를 늘 생각하여 공동체의 건덕을 위해 사려깊은 행동을 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Harrison).

====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 이는 강조적 문구로서 절대적인 자기 확신을 말한 것이다. '확신하다'(* , 페이도)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용례를 보면 갈 5;10;빌 2:24;살후 3:4에서 강조 완료 능동태 1인칭으로 '주 안에서'(* , 엔 퀴리오)라는 어구와 그 뒤에 '호티'(* , that)절과 함께 쓰여 자기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페이도'(* )의 완료 수동 1인칭 단수인 '페페이스마이'(* )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이다 카이'(* , '내가 알다')가 앞에 놓임으로써 '페페이스마이'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또 본절에서는 * ('엔 퀴리오', '주 안에서') 다음에 '예수'(* )라는 호칭이 덧붙여졌다. 이는 '호티'(* , that)절의 내용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렇다면 '주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거기에다 '확신한다'는 말을 수동형으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 바울이 가진 확신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생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얻은 객관적인 진리임을 의미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복음 안에서 갖는 확신임을 뜻한다. (2) 바울이 여기서 예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사용한 것은 역사상의 예수의 어떤 특정 가르침, 즉 마 15:10, 11, 15-20;막 7:15-23 등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 아울러 자기의 확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위의 세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여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합니다'고 강력하게 자기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Godet, Meyer, J. Murray, Cranfield).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 이 말은 바울이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진리로서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의 헬라어 '디 헤아우투'(* )는 '그 자체가' 혹은 '본질적으로'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주신 음식물 그 자체'를 말한다(Godet, Cranfield, Sanday). 바울은 여기서 인간들의 행위, 태도, 욕구, 사고 등에 대해서 논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피조(被造) 세계의 자원, 그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먹는 음식으로 주신 모든 것 그것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없으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의 헬라어 '우덴'(* )은 본절에서 제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이논'(* , '속된 것')이란 단어 역시 그 자체는 불견하고 순결치 못한 것 특히 율법의 의식에서 깨끗치 못한 것을 의미하나(막 7:2, 5;행 10:14;히 10:29;계 21:27) 여기서는 어떤 음식물도 그 자체는 속(俗)된 것, 즉 불결한 것이 없다는 것을 천명한다. 결국 바울은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먹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본절에서 뿐만 아니라 딤전 4:4에서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확언함으로써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음식물에 대한 강한 자들의 기본 입장과 사도의 견해가 일치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취해야 할 정당한 원리가 된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1) 바울의 주장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확신하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막 7:15-23)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 가운데는 모든 음식물이 그 자체는 깨끗하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Harrison). (2) 창조에 관한 말씀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의 견해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창조 기사의 말씀과 그 원리를 같이하고 있다. (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이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바울의 확신은 아주 타당한 것이다(히 9:12). 이는 '속되다', '속되지 않다'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는 구약 율법의 의식적 부분에 관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새 시대가 도래하여 옛 시대의 그 의식법(儀式法)에 문자적으로 순종할 필요가 없다. 신약의 빛 아래 사는 우리는 이제 구약의 그 의식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즉 그리스도 그분을 믿을 때 그 의식에 순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Calvin, Kasemann, Cranfield).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구약의 의식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해 주어진 이상, 그리고 구약의 율법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영원하신 속죄의 제물이 되어 거룩한 사역을 완성하신 이상, 이제는 더이상 구약의 율법 의식에서 불결한 것과 정결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문자적으로 매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런 진리를 파악하여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하여' 율법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음식이 더 이상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이런 진리를 아직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신자들, 즉 진리 안에서 내적 자유를 얻지 못한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이 의식법에 대한 문자적 순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 종교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금지되었던 고기들은(음식물은)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더 이상 부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스스로 속되게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여전히 불결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는 바울의 확신을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음식물을 깨끗하지 않다고 그의 마음에 확신한다면(레 11장 참조) 그에게 있어서 그 음식물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分量)과 함께 신앙 양심의 자유에 근거한 개인의 확신에서 행해지는 것이므로 누구도 판단할 성격이 아님을 양쪽 모두에게 절묘하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Murray, Meyer). 이런 뜻에서 바울은 전반절에서 약한 자에게 강한 자의 믿음의 수준을 이해시키면서 음식물의 본질에 대한 진리를 설명한 반면 후반절에서는 강한 자에게 약한 자의 믿음 분량을 깨우쳐 준 것이다.

====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가르'(* , '왜냐하면')는 바로 앞절(14절)과 연결된 접속사가 아니라 13절 하반절과의 연결 접속사이다. 14절은 삽입절이다(Meyer, Liddon, Hendriksen). 즉 '연약한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말 것을 결심하라(13절) 왜냐하면(* , 가르)는 만일 그것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15절).' 이렇게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본절은 바울이 강한 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를 수락한다는 점을 명백히하고 동시에 그러한 태도에는 잊지 말아야 할 중용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여기서 '근심하게 되면'의 헬라어 '뤼페이타이'(* )는 '뤼페오'(* )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수동형으로서 '어떤 일의 영향을 받아서 양심의 괴로움을 겪는 것'을 말한다. 또는 '어떤 일로 인하여 신앙의 압박을 받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고민에 쌓인 것'을 뜻한다. 요컨대 상처받은 양심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마 14:9;17:23;막 10:22;요 16:20;Meyer, Godet, Hendriksen). 즉 믿음이 약한 자가, 자유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 때문에 아직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어떤 일을 행하게 된다면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의 신앙의 순결성과 성장에 손상을 입을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믿음이 강한 자의 자유가 제한을 받아야 함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바울은 자유의 구가(謳歌)가 보다 중요한 형제 사랑에 의해 절제되어야 할 것을 호소하면서 성도의 생활과 행동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벧전 4:8;요일 3:16;4:8).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 의식적인 율법과 관련한 자신의 내적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믿음이 연약한 형제에게 강요함으로써 아직 깨달음과 행위가 거기에 이르지 못한 형제를 근심케하고 영적으로 파멸(破滅)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짓밟는 행위임을 말한다. 루터(Luther)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어떤 것이 정당한 믿음의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당신의 형제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당신은 잔인한 살인자와 같다. 뿐만 아니라 내 형제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멸하는 것이 되기에 그것은 온갖 종류의 잔인성을 능가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연약한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도 죽었기 때문이다"(고전 8:11).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표현한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염두에 둔 것이다. (1) 한 형제의 소중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여 구원한 형제임을 생각할 때 그가 아무리 연약한 자라 하더라도 사랑으로 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도 남는 것을 교훈한다. (2) 형제를 근심케 하는 일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 자유의 구가보다도 사랑의 원리를 따라 형제를 생각하며 행동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의 희생(犧牲)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내와 희생이 거절되어 자기의 판단대로만 행하므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근심케 되어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무서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죄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짓밟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모울(Moule)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주께서는 너의 상처받는 형제를 그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너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의 행동은 너의 강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상처받은 형제에게 파멸을 가져오게 한 것으로 간주되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너의 우둔하고 편협하며 이기적인 자유로 인하여 네가 경시한 이 상처받은 영혼을 주님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너무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것이다." '망케 하다'(* , 메 아폴뤼에)는 말은 대체적으로 네 가지로 해석된다. (1) 한 영혼을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Tholuck). (2) 죄를 짓게 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실족한 자리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Murray). (3) 철저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Meyer). (4) 인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Kasemann). 여기서 우리는 (1), (2)의 견해를 취함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바울이 연약한 자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말 것을 촉구한 것(13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물론 연약한 자가 계속 죄를 지어 하나님과 단절된 자리에 있다면 결국 멸망에 빠지게 됨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3)의 견해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형제를 넘어뜨리는 일의 위험성과 이로 인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강한 자들에게 하는 데 있다. 즉 자유에 대한 자기 본위의 주장은 연약한 자들을 무너뜨리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냉엄하게 책망한 것이다.

====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이 구절은 적어도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1) 이 구절은 강한 자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에게 주어진 것인가 ? (2) '휘몬 토 아가돈'(* , '너희의 선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3) 사도가 언급한 비방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1)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너희의'(* , 휘몬)는 (까)강한 자들만을 가리킨다(Murray). (다)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를 가리킨다(Dunn, Sanday and Headlam). (까)의 견해가 더욱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도는 바로 앞절에서 강한 자들에게 연약한 자들을 근심시키거나 망케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앞절의 강한 자들에게 계속되는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2)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여기서 '너희의 선한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까)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언약적인 모든 축복을 총괄하는 선이다. 즉 의와 구원까지 포함한다(Dunn, Michel, Nababan, Cranfield, Schlier). (다) 강한 자들이 누리는 자유, 특별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말한다(Murray, Calvin, Harrison, Kasemann, Godet, Sanday and Headlam). (따) 하나님의 왕국(Meyer). (마) 믿음(Do Wette). (바) 복음(Philip). (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 전부와 복음(Lenski). 위의 견해 중 (다)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첫번째 문제에서 이 구절이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입장을 지지했다면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 역시 강한 자들이 행사하는 '신앙의 자유'를 말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까)이나 (바)을 지지하는 자들은 이 구절이 훨씬 더 심각한 한 가지 위험에 대해 강한 자들이 자유 행사를 이기적으로 고집함으로써 이 자유보다 훨씬 더 존귀한 '아가돈'(* , '선')에 대해 해(害)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가돈'(* )은 강한 자들의 '아가돈'임과 동시에 약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아가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아가돈'은 복음 그 자체, 곧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관거에 행하셨고 지금도 행사하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강한 자들을 향해서 경고되고 있는 현재의 문맥을 뛰어넘는 해석이다. 한편 (3)의 문제에 대해서도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까) 바울이 비방자들로서 염두에 둔 사람들은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다(Sanday and Headlam, Liddon). (다) 교회 내의 약한 신자들, 즉 채소만 먹는 약한 자들을 의미한다(Godet, Meyer, Hendriksen). 여기서 (다)의 입장을 취함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리고 '선한 것'이 복음, 혹은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당연히 (까)번의 견해를 취하겠지만 이 구절이 강한 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또한 '아가돈'이 '강한 자들의 자유'를 의미한다면 (다)번의 견해를 취함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본절은 강한 자들의 무분별한 행동이 약한 자들에게 여러 손상(13, 15절)을 끼칠 수도 있고 또한 교회내에 불협 화음을 일으킬 수 있기에 특별히 그러한 비방을 받지 않게 주의하라는 경고이다. 물론 교회 안에서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일이 생길 때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을 듣는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論據)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Sanday and Headlam). 강한 자들이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의'(* , 디카이오쉬네)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한다(Godet, Murray, Meyer, 6:13, 16, 18).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의'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서 더욱 확인된다. 한편 '평강'(* , 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Calvin, 5:1;빌 4:7). 그리고 '희락' 또는 '기쁨'(* , 카라)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Calvin, Hodge)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Godet, Meyer, Murray).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의'와 '평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 알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 알라)이란 접속사가 '...만',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의, 평강, 기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Kasemann). (3) 갈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Harrison).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본장 주제 강해 '아디아포라' 참조).

====14:18
본절은 19절과 함께 17절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삽입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Michel) 그보다는 17절의 내용을 다시 설명하고 확인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Kasemann).
이로써(* , 엔 투토) -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곤란한 구절로서 여러 견해가 있으니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성령 안에서를 의미한다(Hodge, Origen). (2)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리킨다(Meyer, Murray, Sanday and Headlam, Cranfield). (3) '이로써'를 가리키는 헬라어 본문 '엔 투토'는 '따라서', '이렇게 하여'를 의미하는 말이므로 17절에서 표현한 진리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다(Barrett, Robertson). (4) '이 방법들로써'를 의미한다(Michel). (5) 바울은 오직 교회 안에 평화를 진작(振作)시키고저 하는 뜻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엔 투토'라는 단수를 사용했다(Gaugler). 여기서 (4)은 매우 약하고 (5)은 무리이며 (1)과 (3)은 문맥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2)보다 덜 자연스럽고 덜 만족스럽다. 따라서 우리는 (2)가 가장 개연성있고 설득력있는 설명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 왜냐하면 문맥에 의해서 볼 때도 그러하고 또 다른 사본(the variant reading)에 '이로써'가 단수가 아닌 복수(* , 엔 투토이스, '이것들로써')로 쓰여졌다는 데서 더욱 확인된다. 이 복수는 분명히 필사자가 17절 하반절에서 말한 3가자 열매, 즉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 디카이오쉬네 카이 에이레네 카이 카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복수로 쓴 듯하다(Cranfield).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의 경우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세 열매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았기 때문이다(Sanday and Headlam, Murray). 이는 갈 5:22, 23에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말하면서도 '열매'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단수인 '카르포스'(* )가 사용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별문제없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봉사가 성령안에서 맺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의와 평강과 기쁜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은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피력한다(Hendriksen).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서 맺어지는 어떠한 섬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형제를 판단하고 서로 비방하는 자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한편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 도키모스 토이스 안드로포이스)는 말은 16절의 '비방을 받다'(* , 블라스페메이스도)와 대조적인 의미로 보아야 옳다(Cranfield). 즉,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람에게도 비방을 받지 않고 그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칭찬을 받는다'는 헬라어 '도키모스'는 사람에게 인정, 혹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모든 경우에서 사람의 칭찬을 받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역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유없이 미움을 받았고, 선지자와 사도들 역시 그러했으며, 바울 역시 그의 서신 딤후 3:12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이다(Calvin).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런 특별한 경우를 말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현상과 그 결과를 말한 것이다.

====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 '이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라 운'(* , '그러면', '그런즉')으로서 앞의 17, 18절을 받고 있는 접속사이다. 앞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그 본질을 명쾌히 제시하여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신다는 것을 원리적 측면에서 선포한 바울은 이제 그 원리가 실제적인 교회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발휘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힘쓰나니'의 헬라어 '디오코멘'(* )은 '급히 가다', '빨리 달려가다', '추구하다', '갈망하다'는 '디오코'(* )의 1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로서 현재 문제가 있는 교회 생활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가 적극적으로 애쓸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 것이다. 바울이 힘쓸 것을 촉구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화평의 일은 힘쓰라. '화평의 일'(* , 타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교회의 화합(和合)을 도모하는 모든 일을 포괄적으로 지칭한 말로서 초대 교회 설교의 관용구이다(딤후 2:22;히 12:14;벧전 3:11). 이는 시 34:14의 내용에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Dunn). 사도는 연약한 자와 강한 자 간의 조화를 위한 직접적인 적용으로 화평을 추구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촉구하는 '에이레네'(* , '화평')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Godet). (2)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 '덕(德)을 세우다'의 헬라어 '오이코도메스'(* )는 '집을 짓다', '건설하다', '굳게하다'라는 뜻인 '오이코도메오'(* )에서 나온 말로서 주로 '건축'에 관련해서 사용된 단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세우다'라는 은유법은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구약성경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예레미야가 이를 자주 사용하였다(렘 12:16;31:4;33:7;42:10;45:4). 그런데 이 비유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니 (1) 그 자신의 사역에 대해 설명할 때 이를 사용하였다(고전 3:9, 10;고후 10:8;12:19;13:10). (2)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벽돌처럼 연결되어 함께 성전을 지어 올라가는, 즉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권할 때 사용하였다(엡 2:19, 20;벧전 2:5). (3) 이 비유법의 가장 빈번한 용례는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들에게 준 충고에서 나타난다. 즉,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덕을 세우라는 권고로 나타난다(Dunn). 예컨데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남으로 야기된 여러 문제들을 다루는 데 바울이 사용한 핵심적인 단어 역시 '덕을 세우라'는 것이었다(고전 14:5, 12, 26, Harrison). 이를 종합하여 본절의 의미를 살펴보면 서로 덕을 세우라는 이 권고는 상호 대인 관계와 상호 의존성을 결정지어 주는 중대한 기준이 된다(15:2;고전 8:1;10:23). 그리고 서로간에 상이(相異)한 은사들의 상대적 가치를 분별하고 인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전 14:3-5). 따라서 본 구절의 개념은 어떤 경건한 의식이나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모든 문제 속에서 실제로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세움을 입어가도록 하라는 것이다. 즉 구체적으로 모든 문제 속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 24)는 원리에 준하여 교회 안에서 화평, 즉 덕을 도모하라는 촉구이다(고전 9:19-22, Calvin). 왜냐하면 로마 교회에서의 긴장은 신앙의 견해 차이로 인한 유대인과 이방 그리스도인간의 분열에 있었기 때문이다.

====14:20
성도들이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쓸 것을 말한 바울은 이제 덕을 세우는 일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함으로써 그의 논점을 강화한다(Harrison).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 '무너뜨리다'(* , 카탈뤼에)는 말은 바울이 앞절에서 사용한 '오이코도메오'(* , '집을 짓다', '덕을 세우다', '건설하다')의 반대말이다(마 5:17;24:2;26:61;27:40;고후 5:1;갈 2:18). 즉 바울은 비본질적인 음식물에 대한 이견(異見) 때문에 본질적인 하나님의 사업(일)을 파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세우라고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업'(* , 토 에르곤 투 데우)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 (1) 혹자는 하나님이 세우고 계신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Sanday, Barrett, Kasemann). (2) 구원사건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았다(Michel). (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연약한 형제, 즉 하나님이 갓 창조하기 시작한 사람 속에서 일으키는 구원 사역을 의미한다(Robertson, Murray). 여기서 (1)의 견해도 무난한 해석이라고 생각되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3)의 견해인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에 비추어 볼 때 13절 이하에서 계속해서 강한 자에게 교훈을 주면서 연약한 자가 근심케 되지 않기를, 그리고 그로 인해 망케 하지 말라고 권고하기 때문이며(15절) 나아가 하나님이 불러 구원하신 한 영혼이 장성(長成)하여 굳세게 서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주된 목표이기 때문이다(Carnfield, Barmby).
만물이 다 정하되(* , 판타 멘 카다라) - 14절을 반복한 교훈으로 강한 사람들의 슬로건처럼 보이는 이 말을(막 7:19;행 10:15;고전 8:4-8) 바울은 머저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음식물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깨끗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14절의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라는 말처럼 한정적 의미의 뜻이다. 즉, 인간의 생각, 욕구, 행위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피조 세계의 자원을 가리킨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 바울은 만물이 다 깨끗함을 인정하였지만 거기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음식물 자체는 그릇된 것이 없지만 만일 음식물을 먹는 습관이나 마음의 자세가 어떤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먹을지라도 나쁘다는 것이다(Bruce). 그러면 여기서 '거리낌으로 먹는'(* , 프로스콤마토스 에스디온티) 행위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 (1) 약한 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압력을 받아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고기를 먹는 행위를 말한다(Kasemann). (2) 형제의 연약함을 보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고기를 먹음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강한 자들의 무절제한 신앙 행위를 가리킨다(Calvin, Hodge). 우리는 여기서 원어의 의미상으로나 전후 문맥으로 보나 (1)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Chrysostom).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 이 구절은 권위있는 선언으로서 역시 강한 자들에게 계속되는 교훈이다(Murray). 바울은 여기서 강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이타적(利他的)인 행위를 극히 선하고 훌륭한 것으로 칭찬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여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악한 행위와 극히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아름다우니라'는 구절이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맨 뒤에 있으므로 강조가 약화되었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문장의 맨 초두에서 '칼론 토'(* ..., '...하는 것이 아름다우니라')라는 구문을 취하여 강한 자들이 연약한 형제를 생각하는 행위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전 7:1, 8, 26;히 13:9). '아름다우니라'의 헬라어 '칼론'(* )은 '선한', '보다 나은', '아주 고상한', '훌륭한', '뛰어난' 등의 뜻인 '칼로스'(* )의 목적격이다. 그러면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강한 자들의 지극히 훌륭한 일 즉, '칼론 토'(* )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 (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 메 파게인 크레아). 이것은 본장 2, 3, 6, 17절에서 말한 '먹는 것'(* , 브로시스)과 15, 20절에서 말한 '식물'(* , 브로마토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음식을 먹을 만한 신앙의 내적 확신을 갖고 있는 강한 그리스도인은 채소만을 먹는 약한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행동 반경을 넓게 할 수 있다. 즉 강한 그리스도인은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도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먹지 않을 자유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약한 믿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형제를 위해 연약한 자가 거리끼는 고기를 먹는 일을 삼간다는 것을 확실히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지 아니함이 영구하고 강력한 금욕(禁慾)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먹다'를 가리키는 '에스디오'(* )의 동사가 20절에서 현재형인 '에스디온티'(* , '먹는')로 사용된 후 바로 이어 본절에서 부정과거 '파게인'(* , '먹었다')으로 사용된데서 확인된다(Dunn). 그러므로 이것은 아직도 구약의 규례에 매여있는 연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잠시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약한 자들이 고기를 먹지 않음은 구약성경에 음식물과 관련된 각종 규제 사항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기를 못 먹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까) 적절한 방법으로 피를 빼지 않은 고기(창 9:4;신 12:15, 16). 다시 말해 고기를 그 피와 함께 먹는 것은 모세의 율법(레 19:26;신 12:23-25;15:23)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노아에게 행한 하나님의 명령(창 9:4)에 의해서도 금지되었다. (다) 부정한 동물의 고기(레 11:8;신 14:8). (따) 우상 제물의 고기(고전 8:13). 물론 고기를 먹는 그 자체를 율법에서 금하는 것은 아니었고(출 12:8;민 11:18) 다만 위의 금기 사항과 관련된 고기를 피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바울은 이런 규례를 아직도 준수하는 연약한 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강한 자들이 신앙의 자유의 행사를 절제(節制)하는 것이야말로 칭찬받을 만한 아름다운 행동임을 밝히고 있다(Harrison). 즉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위해서 그것을 먹지 않는 이타적인 행동을 요구한 것이다. (2)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 메데 피에인 오이논). 이는 '칼론 토' 구문의 두번째 용어로서 17절의 관용구 '브로시스 카이 포시스'(* ,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중에 '포시스'(* )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밝혀준다. 그러나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 자체는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에(신 7:13;11:14;막 14:23-25;요 2:1-11;딤전 5:23)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는 하나의 가상적인 실례로서 언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보다 개연성이 높은 해석은 모든 고기를 피하는(삼가는) 조심스러운 행위는 포도주까지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Dunn). 왜냐하면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이러한 행위들은 약한 자들이 자기를 지키는 실제적 관습이었기 때문이다(레 10:9, 10;겔 44:21;단 1:3-16;10:3). 그러므로 이것 역시 약한 자들 편에서의 금주(禁酒)가 아닌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의 금주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서 이런 행위야말로 참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3)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 메데 엔 호 호 아델포스 수 프로스콰테이). 이는 '칼론 토'(* )는 구문의 세번째 용어로서 연약한 자를 위하여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다는 원리에서 더 나아가 남에게 거리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니하는 것이 좋음을 시사한다(Godet). '거리끼게 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콰테이'(* )는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다' 혹은 9:32, 33에서처럼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다'는 용례로 사용되었다(Dunn).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약한 형제가 강한 형제의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목격하고서 마음에 상처를 받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강한 자들로부터 받는 압력에 굴복하여 스스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행함으로써 실제적으로 결국 걸려 넘어지는 결과를 초래함을 말한 것이다. 즉 강한 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약한 자들을 마침내 정상적인 신앙 생활에서 이탈되게 하여 그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임을 말한다(Calvin). 이것은 13절과 15절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요컨대 바울은 본절에서 말하는 그러한 종류의 일이 있을 때 자기가 가진 신앙의 확신과 내적 자유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외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른 그리스도인에게도 강요함으로써 동료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의 방해나 또는 파멸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면 그것이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확고한 내적 확인과 자유를 가지지 못한 자가 강한 자의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신앙 인격의 순수성 및 고결성이 상처를 받고 그 영혼의 상태가 상심케 되며 혼돈케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런 내적 확신과 내적 자유의 외적인 표현은 기꺼이 절제(節制)하고 단념해야 한다. 이러한 일이야말로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교훈이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를 안하는 것이 소극적인 자세라면 이에서 더 나아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열매를 맺어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17, 19절) 힘쓰는 것은 적극적 자세이다(Cranfield).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 이 구절은 일반적인 것으로 강한 자와 연약한 자 모두에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Robertson, Cranfield) 십중팔구 주로 강한 자들에게 주는 권고이다(Murray, Harrison, Calvin). 왜냐하면 자기의 확신에 따라 은밀히 행동할 것을 경고받은 자는 다름아닌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15, 20, 21절). 여기서 '네게 있는 믿음을'(* , 쉬 피스틴 헨 에케이스)이란 구절은 단순한 질술 이상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로서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 '는 질문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Godet, Meyer, Calvin) 또는 '피스틴'(* , '믿음') 뒤에 있는 관계대명사 '헨'(* , which)을 살려서 '너는 네가 가진 믿음을' 지키고 있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믿음'(* , 피스티스)이란, 강조 용법으로 표현된 '쉬'(* , '너', '당신', 여기서는 강한 자를 말함)가 가진 믿음으로서 구체적으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는 믿음을 말한 것이다(Calvin, Murray, Cranfield).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 카타 세아우톤 에케 에노피온)는 말은 네가 가진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에게 간직하고 있으라'는 말로서 '에코'(* , '가지다', '붙잡다', '소유하다')의 현재 명령법이 사용되었다. 이는 자신의 신앙의 확신과 자유를 즐기기 위해서 그것을 외적으로 함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오히려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隱密)한 일로서 자신의 내적 삶에서만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자의 자유권이 공공연하게 행사된다면 이는 연약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므로 이러한 자유권의 행사는 가능한 한 삼가야 하기 때문이다(Harrison). 즉 믿음의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그 믿음의 자유를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 구절은 자신이 행하는 일의 정당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복되다는 일반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양심이 무딘 그리스도인들도 복되다는 진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Cranfield). 이 선언은 앞 내용과 계속되는 것으로서 강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선언이다(Murray). 즉, 강한 그리스도인이 앞에서 계속 언급한 진리에 주의를 기울여(15, 20, 21절)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내적 자유의 외적 표현을 삼감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며(17절) 하나님의 사업을 세워가는 행위가(19절) 참으로 아름답고 복되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복이 있도다'(* , 마카리오스)는 미래의 어떤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특히 평화로운 양심의 현재적 상태를 말한다(Calvin, Murray, Godet). 왜냐하면 그는 전혀 의심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분열이 없으며, 더욱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행함으로써 자신을 책(責)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이 있도다'의 조건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한 자'여야 한다. 여기서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도키마제이'(* )로 자신을 '시험하다', '검토하다', '분석하다'(* , 도키마조)의 현재 능동형이다. 그리고 '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크리논'(* ) 역 시 '정죄하다', '심판하다'(* , 크리노)의 현재 능동형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 행위를 스스로 면밀히 검토하여 자신의 신앙 양심에 가책(呵責)이 없다면, 즉 자기가 확신하여 행동한 바에 대하여 전혀 갈등이 없는 상태를 소유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선언이다(Calvin, Godet).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 이 구절은 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교훈으로서 앞절(22절)에 묘사된 강한 그리스도인과 대조를 이룬다(Murray).강한 형제가 가진 그 특별한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따라서 자기 행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심정으로 고기를 먹는다면 정죄(定罪)를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크리노메노스'(* )는 '주저하다'라는 뜻을 가진 '디아크리노'(* )의 복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진리의 말씀에 의한 확신이 없어 갈팡 질팡하면서 갈등하는 상태를 말한다(Calvin). 그리고 '정죄 되었나니'(* , 카타케크리타이)라는 말은 '심판하다', '정죄하다'의 뜻을 가진 '카타크리노'(* )의 완료 수동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죄되었다'는 말은 인간을 구원에서 배제하는 하나님의 미래 활동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그릇된 자로서 이미 정죄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Harrison).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 이 구절은 앞의 내용이 왜 그런가를 명확히 제시한다. 즉 의심하고 먹는 자가 정죄된 이유는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말해 그의 믿음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허락한다는 완벽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확신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위선적인 행동을 한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갈 2:11-14). 그는 확실히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고 따라서 바울의 책망을 들었을 때 항변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양심이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행동한 것이 필연적으로 정죄받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 , 피스티스)의 의미는 본절 후반절에 나오는 믿음의 의미와 같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 이는 본장의 결론적인 선언이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의 믿음을 뜻한다(Godet). (2) 선한 양심같은 그 무엇을 뜻한다(Sanday and Headlam). (3) 자기의 기독교적 신앙이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도록 그와 관련된 내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확신, 즉 말씀의 원리에서 깨달은 마음의 확신을 말한다(Cavlin, Murray). 위의 견해 중 세번째가 가장 무난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장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믿음(1, 2, 22, 23절)과 어울리는 유일한 해석이 (3)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3)의 견해는 실제적으로 부분적인 면에서 (1)과 (2)의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Robertson). 그리고 '죄니라'(* , 하마르티아 에스틴)는 말에서 '죄'를 가리키는 '하마르티아'(* )는 통상적인 용법과 다른 방향에서 사용되고 있다. 즉 '하마르티아'(* )가 본래적 의미로서 일반적, 보편적으로 죄의 개념을 뜻했다기보다는 개개의 죄악된 행위들을 염두에 둔 말로서 믿음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모든 일, 즉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내적 확신을 따라 행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이 어떤 일일지라도 죄가됨을 의미한다(Cranfield). 이렇게 하여 바울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의 차원을 넘어 성도의 모든 생활의 근본 원리를 선언함으로써 강한 자와 연약한 자를 향한 본장의 권면을 마친다.

Monday, January 25, 2010

로마서 7장 7절 ~ 25절( 마음의 법 육신의 법)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 이 표현은 '그런즉 어찌하리요'(6:15)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앞에서 설명한 바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하든지 아니면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면서 또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한 바울의 상투적인 문장 전개 방법이다(3:1;4:1, 10;6:1;8:31;9:14, 30;10:8).
율법이 죄냐 - 바울이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했으므로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율법이 죄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사실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한 것은 율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사람이 육신의 지배를 받을 때는 율법이 도리어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 이 말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는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 죄는 율법 때문에 생성되는 것도 아니며 율법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다(Calvin). 다만 율법은 그 죄를 죄로 규정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율법으로 말미암지'란 말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는 데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 바울은 율법 중 탐심(貪心)을 경계하는 구절을 대표적으로 언급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탐심은 인간의 심성 속에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실제적인 범법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로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의 심성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악한 동기도 죄라고 가르쳐 줌으로써 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인간 사회에서는 '탐심'으로는 죄가 성립되는게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악한 동기조차 죄로 규정된다(마 5:27, 28;6:1-4, 18). (2)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으로 표현될 수 있듯이 타락한 인간의 죄는 탐욕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또한 우상 숭배와 같다(골 3:5). 바울이 '탐욕'을 우상 숭배와 같이 취급한 이유는 둘다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7:8
죄가 기회를 타서 - 본문은 '죄'(* , 하마르티아)가 주체로서, 인격성(人格性)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기회를'(* , 아포르멘) 엿보다가 '취한다'(* , 라부사)는 의미이다. 이처럼 죄가 인격성을 가지고 능동적인 활동을 한다는 표현은 죄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그 유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해리슨(Harrison)의 말대로 본절 배후에 유혹과 타락에 관한 창세기 기사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죄'가 인격성을 가진 주체로 표현되는 것은 사단의 교활한 특성을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틈만 보이면 달려드는 맹수 같은 성격을 가진 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탐심이 속에서 잠재해 있다가 계명으로 인해서 드러난다'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이미 7절 하반절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이 백지와 같음을 전제하고 죄가 계명을 통해 탐심을 유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인간 내부에 있는 탐심이 죄의 요구를 따라 계명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온갖 탐심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처럼 끝없이 유발되는 죄로 인하여 인간은 도무지 살길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 본 구절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는 말씀과 의미상 같다. 왜냐하면 '죄가 죽었다'(* , 네크라)는 것은 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이 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Calvin). 아무튼 본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죄 자체는 항상 활동하고 있으나 인간 편에서 법이 없을 때는 그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율법의 죄를 밝히 드러나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 본장에서 강조되고 있다.

=====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이라도 바울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율법의 각 조문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않게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10:3)사람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바울은 율법에 대한 지식은 있었으나 깨달음이 없었던 것이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 '계명이 이르매'란 표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명을 깨닫게 되매'라는 말로 의역이 가능하다. 그리고 '살아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제센'(* )은 '아나자오'(* )의 부정과거 동사로 본래 '다시 살아나다', '희생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단순히 '활동하게 되다'라는 의미이다(Hendriksen). 죄가 본래부터 있었으나 사람이 계명에 대해 깨닫기 시작하면 죄가 자기 속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죄의 요구도 함께 커지므로, 죄에 대한 자신감보다는 죄를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된다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과 복의 근원'이었다(신 5:31-33).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어 있었다(겔 20:11).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범죄할 기회를 주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의 길에서 인간의 생명을 지도하고 규정하여 생명을 보존하자는데 있다(Murray). 그리고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달은 시 119편의 저자는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 119:14)고 고백했다. 따라서 바울이 지금까지 부정적으로 언급해온 율법은 그 진정한 정신이 망각된 형식적인 유대인의 율법이기도 하며 또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으로써 그 기능을 다하는 의미에서의 그 율법이다(갈 3:23-25).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 인간은 어느 누구도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 없으므로, 그 계명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여기에는 바울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으나, 그것은 그에게 생명에 대한 희망보다 오히려 비참한 절망감과 정죄(定罪)만 주었다. 이러한 체험은 종교 개혁자 루터(Luther)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믿음에 대한 눈을 뜨기 전에는 형식적인 교리와 규정들이 그를 짓누르며 생명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는 사망의 상태가 그를 괴롭힐 뿐이었다. 본절의 '되었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데'(* )는 '발견하다'는 뜻의 동사 '휴리스코'(* )의 단순 과거 수동태 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이후에 비로소 율법과 계명이 자신을 정죄하며 그 자체 안에서는 죽음밖에 없음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7:11
표현 방법상 본절은 8절과 같지만 내용면에서는 서로 다르다. 8절은 죄를 드러나게 하는 계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본절은 계명을 통해서 죄가 사람에게 철저한 좌절감을 맛보게 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를 속이고 -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던 바울은 이제 계명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이전과 같이 자신이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마땅히 계명을 지킬 수 있어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바울은 죄가 계명을 통해서 자기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속임수는 죄가 계명을 통해서 바울로 하여금 죄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네가 그래도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 ?'고 정죄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와 같은 속임당함에 의한 심한 좌절과 고민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속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세파테센'(* )이 '여사파타오'(* )의 단순 과거 능동태 형으로서 '완전히 길을 잃게 만들었다'(mislead)는 점에서 분명하다.
나를 죽였는지라 - 이 표현은 9절 하반절의 '나는 죽었도다'란 고백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Murray). 혹자는 바울이 죄로 인한 '사망의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율법을 추종하던 때의 일이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구절들에 의해 결코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갈등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7:12
이로 보건대 - 계명 자체가 사람에게서 죄를 유발(誘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가 계명을 도구로 하여 사람을 속이고 정죄하는 이 모든 사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본다는 의미에서 바울은 본절의 접속사(* , 호스테)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율법도 거룩하며...의로우며 선하도다 - 이 선언은 직접적으로 7절의 '율법이 죄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만, 문자적으로는 율법과 계명이 지닌 속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투영(投影)되어 있으므로 그 자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할 수밖에 없다.

=====7:13
본절에서 바울은 계명이 선하다는 사실을 변증하면서, 그 선한 계명과 죄 그리고 성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요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계명은 성도들 가운데 있는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한다. 이때 성도는 심한 죄의식을 느끼게 되며 선을 행하여 거룩하게 되고자 했던 소망이 좌절되어 심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계명은 성도로 하여금 스스로 의롭게 되며 선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허무하게 만든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된 성도가 그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계명이 성도의 삶을 좌절시킨다 하더라도 계명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계명이 성도를 허무와 좌절에 빠지게 한다면 폐기(廢棄)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율법 폐기론 내지는 율법 무용론을 염두에 두고 이에 대하여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메 게노이토)고 분명히 잘라 말하고 있다.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은 율법의 기원이 하나님께로서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Black). 실제로 '신령한'(* , 프뉴마티코스)이란 형용사는 신약성경에서 세상적이고 육적인(* , 사르키노스) 것과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전 2:13, 15;3:1;10:3, 4;12:1;15:44;엡 5:19;골 1:9;벧전 2:5). 그러나 율법이 비록 신적인 기원을 가진 신령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닌 약점(弱點)은 아무것도 온전케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히 7:19).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율법이 신령한 것이었던 점과 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육신에 속한(* , 사르키노스) 자라고 고백한다. '육신에 속한 자'란 죄에 대해 저항력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바울이 6장에서 이미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율법과 관련해서 볼 때, 성도는 항상 육신에 속한 자이며 죄인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성도는 육신에 속한자요 죄 아래 팔린 자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 혹자는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Thomas). 그렇다면 본절이 바울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난 고백이 아니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러나 바울은 이신 칭의(3:21-4:25)와 그것에서 비롯된 하나님과의 화해(5:1-21)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함께 거룩(성화)의 성취(6:1-23)에 대해서 논리를 전개해 왔고, 본장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에 걸맞는 삶을 살아보려고 시도했으나 다시 율법의 굉장한 벽에 부딪힌 체험을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겪는 신앙의 갈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말은 '죄에서 해방되었다'(6:18, 22)는 말과 대조적인 표현이다. 성도는 이 두 가지 신분을 동시에 지니고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면 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행하는 것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울 자신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뜻하는 바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도의 신앙적인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회의가 찾아들게 되는 시점이 바로 이때이다.

=====7:16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 바울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율법에 따라 의롭고 정당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는 그 원하는 바가 나오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바가 나타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해 내기 위해 바울은 앞에서 했던 말을 다시 조건문 형식으로 반복한다. 동시에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가 제시하게 될 해결책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있다.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 율법은 인간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지켜질 수 없다. 율법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죄 아래 매인 자신의 모습만 발견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의 의지로 도달될 수 없는 지고선(Summum Bonum)이다. 율법은 바울이 원치 않는 바를 행할 때마다 그 자신을 정죄한다. 이때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7:17
이제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뉘니데'(* , '그러면 이제는')는 3:21의 '이제는'과 같지만 본절에서는 어떤 주제의 전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면' 또는 '그런즉'을 의미하는 '운'(* )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Barmby). 따라서 15절과 16절에 이어지는 논리의 진전이 본절에서 제시되는데, 15절에서는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한다는 것을, 16절에서는 이처럼 원치 않는 것을 행할지라도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서술하고 나서 본절에서는 더욱 분석적이고 세밀하게 이 사실을 말하고자 '그러면 이제는'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바울은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죄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비록 죄가 자기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다. 즉 바울은 죄가 기회를 탈 수 있는 불의의 병기로 자기 몸을 죄에게 드렸던 점에 있어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리고 본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려는 자아와 그 자아를 이기고 나타나는 죄를 구분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록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어도, 자신의 실체는 이미 의롭다 인정받은 의인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죄를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다.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 성도의 신분은 영에 속한 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죄를 대항하기에 무기력한 '육신'(* , 사릍스)을 가지고 있는 신분이다. 이 육신이 있는 한 죄는 항상 기회를 타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 이러한 체험은 바울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누구든지 이러한 현실을 인정치 않는 자는 외식자가 되든지 완전주의자가 될 것이다. 외식자는 자신의 잘못을 항상 합리화시키기에 바쁠 것이며 완전주의(Perfectionism)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서 평생 갈등과 고민 가운데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마음은 선한 것을 행하려고 결심하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마음의 원하는 바를 실천할 수 없다(마 26:41). 이러한 사실은 인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부패의 뿌리가 얼마나 큰 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비록 거듭나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결심하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을 장악하여 성도로 하여금 선한 일을 위해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성도는 이 사실을 깨닫고 무력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쓰면 쓸수록 철저한 패배로 인한 비참함만 맛볼 뿐이다(24절).

=====7:19
본절은 15-18절까지의 진술을 요약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까지의 진술을 요약 반복함으로써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이 분명히 어떤 사실에 대한 것이었는지 보여 줌과 동시에 지금까지 고백한 신앙적인 딜레마(dilemma)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 갈 준비를 하고 있다.

=====7:20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본구절은 17절의 반복이다. 그러나 바울이 유도해 내는 내용은 서로 다르다. 본절에서는 상반절에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이라는 조건절이 언급된 다음 본구절이 곧바로 언급된 반면, 17절에서는 본절 상반절과 똑같은 조건절이 16절 상반절에 언급되고 그 다음 17절에서 본구절과 같은 말이 진술되기 전 16절 하반절에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본 구절에서 언급된 말이 16절과 17절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과 연관지어져 있으나 본절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세력에 대한 진술과 연관되어 있기(21-23절)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17절에서 언급했던 말을 본절에서 다시 반복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겪어야 하는 심각한 신앙적 현실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한편 본절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죄를 짓는 우리의 현실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극복되어야 할 신앙적 현실이라는 차원에서 본구절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를 우리의 죄를 합리화시키는 진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7:21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 일반적으로 바울은 '법'이란 단어를 율법에 대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그 뜻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혹자는 이 '법'을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세가지 법, 곧 하나님의 법(22절), 마음의 법(23절), 죄의 법(23절)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그리고 혹자는 이 '법'이 '하나님의 법'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urray). 또한 이 주장을 뒷받침 하는 해석을 유도하기 위해 '법'이란 단어 앞에 수단을 가리키는 전치사를 써서 '법에 의해서'라는 의미로 의역하는 학자도 있다(Erasmus). 그러나 머레이(Murray)의 주장은 큰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22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의 법과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닌 마음의 법만 강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대조되고 있는 '죄의 법'도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법'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우리 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립의 원리를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지배 원리'(governing principle) 또는 단순히 '원리' 정도로 해석하는 데(Harrison, Black), 이것은 본절에 사용된 '법'의 의미에 접근을 했으나 그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19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신의 모순된 행위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그러한 모순된 행위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 이유는 자신 속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바울은 악을 외부적인 어떤 요인이 아니라 사람 내부에 존재하는 실체(實體)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악은 인간 내부에서 잠잠히 있지 않고 항상 인간의 모든 지체를 지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Hendriksen).

=====7:22
내 속 사람으로는 - 혹자는 23절과 25절에서 대조되고 있는 마음과 육신이 몸과 영 또는 정신과 물질 간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구별이 아니라 윤리적인 구별이라고 주장한다(Murray). 이와 반대로 혹자는 고후 4:16을 근거로 하여 속 사람을 썩어질 겉 사람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Black). 더 나아가 혹자는 속 사람을 인간의 실질적인 자아로서 영(spirit)과 혼(soul)과 같은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겉 사람을 사람의 몸과 그 지체로 이해한다(Lenski). 여기서 후자의 주장들은 바울의 전체 사상 중에서 인간 이해 부분에 대해서는 만족시켜 줄 수 있으나 본절 이하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속 사람이 23절과 25절의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구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의 실체를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윤리적인 면에서 속 사람을 단순히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아로 규정하고 악을 행하는 다른 자아와 구분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노모 투 데우'( )가 '율법'을 의미하는지 8:2의 언급과 같은 '성령의 법'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율법'으로 이해한다(Hendriksen, Murray, Harrison, Lenski). 그렇지만 '하나님의 법'이 '성령의 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율법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지금 바울이 진술하고자 하는 것은 속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나 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거룩한 원리를 따르기를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이 '율법'이나 '계명'을 포괄하는 '거룩한 원리'로 해석되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즐거워하되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도마이'( )는 일차적으로 '...와 함께 즐거워하다'로 직역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치사 '쉰'( , '함께')과 결합된 합성 동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렌스키는 '...와 교제 하거나 교제하게 되어 즐거워한다'는 해석을 제안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함께'라는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없으므로 단순히 '...을 즐거워하다'(delight in, KJV, NIV, RSV). '...을 기뻐하다'(rejoice in;Scott, Robertson)라고 해석하는 것이 낫다. 또한 이 동사가 1인칭 단수를 나타내므로 '내가...을 즐거워하되'라고 이해해야 한다.

=====7:23
내 지체 속에서 - '지체'(肢體)는 '육신'과 동일한 의미다. 이 지체는 단순히 몸의 각 부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대항하기에 전혀 무기력하며 죄로 인해 사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의 몸'의 각 부분을 가리킨다. 비록 '지체' 그 자체는 '육신'과 마찬가지로 악한 것이 아니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의 지체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지체'는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는 것이다(6:13). 그러나 우리의 지체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데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에라야 의의 병기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 '마음의 법'은 22절의 '하나님의 법'에 상응하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법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선한 의지를 일으키며 '한 다른 법'인 '죄의 법'과 투쟁 관계에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법'은 마음자체에서 일어나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의지를 선한 양심 안에서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이다. 한편 바울은 '한 다른 법'과 '마음의 법'이 투쟁 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싸워'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즉 성도안에는 이 두가지 법이 서로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투쟁하고 있으므로 성도는 자신도 모른 사이에 갈등 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성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이 당연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이러한 언급을 성도들에게 하지 않았다면, 성도들은 이 두 법의 갈등으로 인한 신앙적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 '하나님의 법'이나 '마음의 법'이 단순히 율법이나 계명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죄의 법' 역시 어떤 명문화된 법을 의미하지 않고 죄가 역사하는 원리 또는 죄의 세력을 지칭한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워 마땅히 하나님의 법이 이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이기고 성도를 죄의 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성도가 현재의 삶 가운데서 겪게 되는 실상이다. 바울이 성도가 겪게 되는 신앙적인 현실에 대해 이토록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1) 성도 자신이 현실에서 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며 (2) 이러한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지닌 넓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3) 그런데 여기에는 성도 자신의 실존이 변화되어 있는 상태로 있기 때문에, 죄의 법이 심각한 도전을 해도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비참한 현실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고 선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보는 도다'라는 표현은 경험적으로 '알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시각적인 경험으로 표현하여 성도가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강조한다.

=====7:24
스토트(J. Stott)는 본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불신자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특정지워지면 본절과 같이 자신을 '비참한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한다. 성숙되지 못한 성도는 '자기 확신'(self-confidence)으로 특정지워지며 자기를 구원할 자에게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성숙된 성도만이 '자기 혐오'(self-disgust)와 '자기 절망'(self-despair)의 상태에 이르게 되며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조금도 거하지 않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이 사람은 자기의 곤고함을 알아 믿음으로 구원을 위해 호소한다." 이와 같이 스토트는 본절을 거듭나지 못한 자의 탄식이 아니라 거듭났으며 성숙된 성도의 탄식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구원을 위한 호소'는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호소(Murray)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간의 갈등을 극복케 해달라는 호소이다. 불신자 또는 거듭나지 못한 자는 자기속에 일어나는 두 법의 투쟁을 깨닫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 탄식하지 않는다.
곤고한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탈라이포로스'(* )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비슷하게 '심한 고난을 겪는 사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여 '비참한 사람'(wretched man, KJV, NIV, RSV)으로 번역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혹자는 바울이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한 것은 절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고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Lenski). 그러나 이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지금 바울의 탄식은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항상 실패한 자신의 형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전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절망감과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통'이나 '고민' 정도로 '탈라이포로스'를 해석하게 된다면 탄식하는 바울의 심정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사망의 몸 - 숙명적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세력을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의 몸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망'은 '죄의 결과'로 초래되는 것이므로(6:23) 죄의 세력을 의미한다.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바울은 24절의 탄식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본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즉 바울은 그토록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속을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3:21-6:23이 교리적 차원에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준다면 본절은 교리를 현실적인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자신이 겪은 갈등을 통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앞에서 계속 진술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지만, 본절은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같은 표현이 앞에서는(20-23절) 탄식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본절은 진정한 해방의 선포를 위한 내용이다. 즉 이는 탄식이면서도 몸의 구속 곧 진정한 구원을 기다릴 준비를 갖게 하는 내용인 것이다(8:23). 이처럼 본 구절은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을 비참한 현실적 삶을 통해 여과(濾過)시켜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진 보다 깊은 비밀로 이끌어 가도록 전환시키는 분수령이다.

Friday, January 22, 2010

로마서 4장 3절 ~ 16절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일반적으로 문어체에서는 '기록된 바'( , 카도스 게그라프타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3:10). 본절에서 바울이 의문문의 형식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구어체적(口語體的)인 것으로 독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서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해 보기 의함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 본 구절은 창 15:6을 인용한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약 2;21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uther).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약 2:21은 창 26:5과 관계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야고보 사도는 믿음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삶(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창 15:5에서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을 성취시키실 뿐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믿음과 행위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에 기록된 또 하나의 구절을 극복해야 한다. 시편 106:31은 비느하스의 열정적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며 비스하스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스하스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칭의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비느하스의 행위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믿음의 한 열매로서 주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J. Murray). 경건치 아니한 자, 또는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의 칭의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과 '믿음의 선한 열매로 인한 결과'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 )는 '로기조마이'( )의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1)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동적 행위를 의미하며 (2) '의롭게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정도로 인격(person)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신분적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4:4
일하는 자에게는 - 본 구절에 대해 혹자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으로 추구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Calvin). 본절 전체가 일상적인 고용 관계에 대한 것을 비유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에서는 1차적으로 삶을 위해 일하는 일꾼을 의미하며, 2차적으로는 다음절에 기록된 '일을 한 것이 없는 자'와 '믿는 자' 등과 대조를 이루는 개념으로서 단지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 삯을 - 일꾼이 요구하는 '삯'( , 미스도스)은 문자적으로 일해준 것에 대한 품삯을 의미하지만(눅 10:7;딤전 5:18) 은유적으로는 '보상'(reward)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약에는 삯을 뜻하는 말로 '와소니온'( )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이는 눅 3:14에 병사의 급료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본서에서는 죄의 '삯'(6:23)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일꾼이 그의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이 정당한 요구를 '빚'( , 오페일레마)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용법이다.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 '빚'( , 오페일레마)은 '삯'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으나 '은혜'( , 카리스)와는 대조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빚'은 히브리어로 '맛솨아'( )로서 주로 모세의 율법에 나타나는 바, 채무 관계를 지적하는 데 쓰여졌다(출 22:25). 무엇을 빌린 자는 반드시 갚아야 했으며 만일 채무자가 정당하게 갚지 못했을 경우 채권자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채무자로부터 생계 수단이 되는 어떠한 것들을 전당물로 잡을 수 있었다(신 24:6). 신약에서 '오페일레마'는 구약에서와 같이 사업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으며(눅 7:41) 특히 비유 속에서는 채무자를 용서하거나 또는 죄인으로 취급할 때 쓰였다. 채무자는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옥에 갇혀 있어야 했으며(눅 12:57-59) 또한 송사(訟事)하는 자에 의하여 재판관에게 고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일하는 자가 삯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채권자가 송사하는 것과 같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 탕감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일'은 자랑이며 동시에 정당한 자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은 일하는 자들의 정당한 삯을 언급함으로써 다음절에 나오는 일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용서와 칭의(稱義)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에게 있어서 행위의 결과는 일꾼이 일한 것에 상응한 대가를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 만한 자리가 없다. 오로지 행위의 주체인 자신의 자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 삯을 위해서 일하지 않은 사람, 즉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가 아니라 의를 얻기 위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이 본절에서 의를 얻기 위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계속 진술했듯이 오직 하나님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 4절과 비교해 볼 때,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과 관련된다(엡 2:8).
경건치 아니한 자 - 이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 애쓰지 않는 자와 동의어지만 죄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주고 있다(Murray).
의롭다 하시는 - '의로 여기시나니'( , 톤 디카이운타)라는 현재 분사형 포현은 그 시제에 있어서 '믿는 자'( , 피스튜온티)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철저하게 믿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도 임한다는 구원의 진리를 적용한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었던 원리와도 일치한다.

=====4:6
일한 것이 없이 - 이 말은 원문상으로 '행위와 상관없이'( , 코리스 에르곤)라는 의미를 지닌다(without works, KJV). 바울이 거듭 강조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행위 내지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 '행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몬' ( )은 '축복'이나 '행복'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단순한 '축복'이나 '행복'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강조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되다고 선포되는 것'이라고 의역하기도 했다(Black). 이 해석을 따를 때, 본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받은 바 축복에 대한 다윗이 선포하기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받은 축복'이라는 구절은 그 속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내포하며 동시에 믿음으로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임할 동일한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4:7
그 불법...복이 있고 -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이 아노미아이'( )이다. 이 말은 '율법'( , 노모스)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 '아' ( )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포괄적으로는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나 보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어긴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율법을 어긴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불법'과 '죄'는 동의어의 반복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하심을 받고'( , 아페데산)라는 동사와 '가리우심을 받고'( , 에페칼뤼프데산)라는 동사 역시도 동의어의 반복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시문학에서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하여 앞절과 뒷절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뜻을 강조하고 그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곤 하였다(시 6:1). 한편 '아페데산'과 '에페갈뤼프데산'은 둘다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의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거나 가리움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을 성취된 구원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 외에 아무것도 없다.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 본절은 7절의 중복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유(私有)하시는 은혜를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절에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 정도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죄'조차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바울이 이신 칭의에 대해 설명할 때에 본 구절은 결정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할 때 논리상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 논리의 틈을 본절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사람이 행한 죄악이 어떻게 여겨지게 되는 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7절과 본절의 인용 구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4:9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로 무할례자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J. Murray).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4:10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포스 엘로기스 데'( )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뇨 ?'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뇨 ?'라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시점(時點)에 관한 것이므로 '어떻게'보다는 '언제'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 의식을 한 때로부터 20여년 전이었다(창 15:6;17:23, 24). 이 대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행 15:1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듯이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들이 받은 바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예로 베드로는 이방인들(무할례자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갈 2:12). 이처럼 초대 교회 당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하여 구별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의(義)의 전가(轉嫁)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팽배되어 있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하여 명백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4:11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 본절에서 바울은 그동안 문제시되었던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진술한다.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유일한 증표로 믿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들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창17:10, 11에는 할례가 '언약의 표징'( , 세메이온 디아데케스)으로 언급되어 있다.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은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증거로 나타내 보이는 표시(sign)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언약을 맺는 것은 쌍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이었다(Robertson). 그러면서도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취하신 은혜와 사랑의 증표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할례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증거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할례에 내포된 은혜의 비밀을 간과하고 겉모양만 취하여 그것이 매우 귀중한 것처럼 자랑하였다.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 '인'( , 스프라기스)은 신약에서 책을 봉(封)하거나(계 5:1), 도장 찍는 것과 같은 증표(딤후 2:19;계 7:2)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모든 일을 결론짓는 마무리를 나타낼 때나 또한 어떠한 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무덤을 봉인하였다는 것도 그의 죽음이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은 세상이 인봉을 통하여 그의 죽음을 확고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마 27:65). 이와 같이 인(印)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특히 본절에서는 이미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확인하는 외적 보증의 의미로 이 용어가 쓰여졌다. 다시 말해서 할례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의 수단도 아니며 단지 이미 의롭게 된 것을 입증하는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적은 성령의 오심(엡 1:13;4:30)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살아났다는 사실을 예표하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 바르트(K. Barth)는 본절을 주석하면서 원(元)역사계와 역사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원역사적인 사실의 믿음의 의가 역사계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은 원역사적인 것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암시적으로 율법 폐기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은 원역사적인 하나님의 의가 현 역사 속에서 단순히 나타나진 것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울은 율법이 의의 전달 내지 계시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3:31). 성도의 신앙은 히 11:1에 언급된 바와 같이 원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실재가 동시적으로 의미를 지닐 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의 천국 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원역사적인 실재임과 동시에 현 역사적인 실재이다(Ridderbos). 할례는 무할례시에 주어진 믿음의 의(원역사적인 것)가 현 역사 속에서 공표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고로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의미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그 표는 단지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확증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따라서 할례 자체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언적 사건으로 그 의미는 항상 남아 있게 된다.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1) 그가 처음으로 할례를 받아 혈통으로 자기에게서 난 자들에게 그 할례 의식을 전했으며, (2) 그 할례를 전할 때 할례만이 아니라 자기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의 의'에 대한 것도 동시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단지 무할례자의 조상이 되어 할례받은 유대인의 조상은 되지 않는다는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본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무할례 시에 가졌던 - 본절에서는 '할례받을 자들'과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할례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없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 무할례자들도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할례 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인'이다. 따라서 무할례든 할례이든 그것이 결코 구원에 있어서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며 (2) 또한 그 할례가 믿음으로 받았던 의를 '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J. Murray). 바울이 할례 자체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실속에 잘 나타나며(행 16:3) 또한 할례를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사건 속에 잘 나타난다(갈 2:3).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 - 이 부류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다 포함된다. '자취'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크네신'( )은 신약 성경에서 '보조'(步調;고후 12:18) 또는 '본이 될 만한 모범'(벧전 2:21)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갈 6:17). 본절에서 '믿음의 자취'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 8:39)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걸었던 그 신앙의 노선을 따라가라'는 의미이다. 이 가르침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을 시사한다. 한편 '좇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오'( )는 '대오(隊伍)를 이루어' 또는 '줄을 맞추어 행진한다'라는 뜻을 가진 군사 용어로서 '일관성 있는 행함'의 의미로 번역되었다(갈 5:25;빌 3:16).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는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4:13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 - 이 약속은 창 17:4-8에 언급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으며, 후에 생긴 율법이 이미 주어진 언약을 취소할 수 없었다(갈 3:17).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약속은 율법에 선행하며, 약속의 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원리는 바울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바대로 '믿음의 의'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의 후사'란 일차적으로 창 17:8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이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창 17:4에 언급된 대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를 좇는 모든 민족이 후사가 되며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갈 3:29). 따라서 본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증'(Hendriksen)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4:14
속된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의 또다른 표현에 의하면 '율법의 종노릇하는 자들'로서 종의 멍에를 멘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오직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hatholic Church)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행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만들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며(갈 1:7), 이렇게 전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갈 1:8, 9).
만일...후사이면 - '후사'를 뜻하는 '클레로노모스'( )는 '상속자'라는 의미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것을 물려받을 자를 뜻한다. 구약의 개념으로 상속자가 얻을 것은 (1) 약속의 땅 가나안(창 12:7;13:14, 15), (2) 믿음으로 자손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후손을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 (3) 한 후손 메시야에 의한 세계 통치를 의미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의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를 잃게 되고 약속된 언약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주장을 한다(요 8:39). 한편 본절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약속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믿음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바울이 시작과 성취 중간에 들어온 율법의 무용성(無用性)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5:20).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요점은 율법 무용론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한 것은 중간에 끼어 들어온 율법이 앞서 있었던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하여 후사가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헛것이 되고'( , 케케노타이)라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원문상 '그 속의 내용이 없어졌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믿음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내용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린다면 약속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약속은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될 것이며( , 카테르게타이, '폐하여졌다') 또한 법적 신실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약속이 보증된다면 율법 이전에 이미 보증받았던 아브라함이 약속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그 약속에 의하여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좇는 모든 믿음은 오히려 율법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율법으로만 약속이 보증되고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타의 윤리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 율법은 행위의 완전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저주를 선포한다(신 28:58ff.).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근거로서의 기능만을 가진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定罪)의 직분'(고후 3:9)이라고 진술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갈 3:13).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들을 위해 의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없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쉬운 예로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법이 없다면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은 아무런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오직 범죄자가 범죄자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법률이 있음으로써 범법자는 죄인으로 정죄받고 심판을 받는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율법에 따른 정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원리에 따라서만 살았다. 또한 노아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에 대한 규례도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인'으로 인정되었다(창 6:9). 그가 의인으로 또한 완전한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죄를 받은 것(창 6:5)은 율법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4:16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믿으으로'( ,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은 '율법을 통해서'( , 디아 노무)라는 개념과 반대적인 의미이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개념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약속된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원문이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전치사 '디아'( )를 사용하지 않고 '에크'( )를 사용한 것도 믿음이라는 것을 수단과 방법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약속이 내용이며 동시에 약속 그 자체이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이 성취된 곳에 나타나는 결과이며 동시에 약속이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본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보다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혜'라는 개념이다. 믿음에 의하여 은혜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1)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며 (2) 신앙의 확실성을 갖게 하며 (3)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실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의 의를 성취하도록 하는 방편이며, 또한 궁극적인 의의 보증이다.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기에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될 수 없다(15절).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효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준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 바울은 '그 모든 후손'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를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14절). 이런 사실 때문에 헨드릭슨(Hendriksen)은 '율법에 속한 자'가 단지 '유대인'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반부에 언급된 '그 모든 후손'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받은 '그 모든 후손'에는 분명히 '믿지 않는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유대인'을 의미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12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서는 곧이어 언급되는 하반절에 의해 더욱 지지를 받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신앙의 공동체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이 포함된다. 지금 바울이 논하고 있는 것은 혈통적인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으로만 '율법에 속한 자들'은 후사가 될 수없다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후사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자들뿐이다.

Wednesday, January 20, 2010

야고보 1장 6절 ~ 27절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 응답받는 기도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믿음'은 '지혜'를 구하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을 확신하고 신뢰하는 것이다(마 21:21;막 11:23). 따라서 성도들은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 행위가 있어야한다(Ropes). 한편 '의심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디아크리노메스'(* )는 '디아'(* ,'사이에')와 '크리노'(* , '분리시키다')의합성어로서 어떤 문제에 대해 양쪽에서 저울질하는 것을 나타낸다(Calvin). 따라서 이말은 심리적으로 두 마음을 품은 분리된 상태 즉 마음 속에서 의심하는 것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다(행 10:20).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 '이런 사람' 은 기도할 때 의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므로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에 대한 부정성보다는 사람이 기도할 때 자기 판단에 맡겨 버리는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에게 의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의심을 극복하고 이겨낼 때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 , 퀴리우)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때 그 기도를 듣고 계셔서, 의심치 않고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시련을 당할 때 인내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이다.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두 마음'(* ,디프쉬코스)은 본서에만 나오는 말이다(4:8).'디프쉬코스'는 신약성경 이전에 전혀 사용된 문헌이 없고 신약성경 이후의 교부시대에 자주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Clement ofRome, Hermas) 아마 야고보가 만들어 낸 단어일 것으로 추측된다(Gibson).이 말은 '정함이 없는'(* , 아카타스타토스)과 평행을 이루는 말로서 두 가지의 방법이나 생각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마음이 항상 불안정하여 변하기 쉬우므로 하나님을 떠나기 쉬운 자들이다.

=====1:9
개역성경에는 '데'(* ,'그러나')가 생략 되어있다. 이 '데'는 9-11절의 내용이2-5절의 시험과 연결된 것임을 나타낸다(Burdick,Martin).왜냐하면 12절에서 다시 '시험'에 대해 언급되기 때문이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 '낮은'에 해당하는 '호 타페이노스'(* )가 신분적인 것인지 아니면 물질적 또는 육체적인 것인지는명백하지 않으나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가리켰으며(시 72:4;잠 30:14, Robertson) 10절의 '부한 형제'(* , 호 플루시오스) 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본절의 '호 타페이노스'는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이렇게 비천에 처한 자들이 자랑해야 할 것은 '높음'이라 했다. 여기서 '높음'이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피조물의 가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승귀를 나타낸다(요15:15; 계 3:21).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비천한 자리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인내함으로 보다 더 영예로운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 지니 - '낮은 형제'와 마찬가지로 부자들도취해야 할 마음이 있다.그것은 자신들이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뽐내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한 자'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자신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ibelius, Blackman).그 이유는 본문상 9절에는 '형제'라는 말이 있지만 본절에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서 '형제'를 생략한 것은 9절에서 사용한 것이므로 본절에서는 반복을 피하여 생략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Burdick, Martin). 따라서 본문의 '부한 자'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물질적으로 부요하거나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은 자를 가리킨다(Marton, Adamson, Cantinat, Mayor, Ro-pes, Mussner). 일반적으로 부자인 형제들은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인하여 영적인 교만함까지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부한 형제들은 지상에서 소유한 부가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일시적인 것임을 깨달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것처럼(빌 2:8) 낮은 자와 동일시하며 부를 자랑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한다(Moo, Tasker).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 본절은 부한 형제들이 낮아짐을 자랑해야 할이유이다. 아무리 부요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부요함을 영원히 누리지는 못한다. 마치꽃이 시드는 것처럼 부(富)뿐만 아니라 생명도 곧 시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시 102:11; 사 40:6,7; 고전 7:31; 벧전 1:24).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 야고보는 사 40:7을 인용하여 부한자의 부를 덧없는 풀의 꽃에 비유하여부한 형제들이 낮아져야 함을 권면한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는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뜨거운 바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소니'(* ) 란 말은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 오는 '시로코' 라는 뜨거운 남동풍으로이 바람이 불어 오면 곧장 채소 따위의 식물이 말라죽곤 하였다(욥 1:19;눅 12:55).이처럼 부자의 입는 옷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오는 안락은 쉽게 시들어 버린다. 그러기에 부한자는 일시적인 부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낮아져야 한다.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 '쇠잔하다'의 헬라어 '마란데세타이'(* )는 '불을 끄다'라는 의미를 지닌 '마라이노'(* )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지상에서의 부와 영화가 영원하지 않으며 사라지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Ropes)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종말의 때에 부로 인하여마음이 교만해 있던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 행한 일로 인하여 심판을 받고역시 그것들과 함께 사라질 것을 시사한다(Martin). 따라서 본문을 해석할때 '부와 함께'를 포함하여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Erasmus, Calvin).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시험'에 해당하는 혤라어 '페이라스몬(* )은 2절에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이스'(* ,'시험')와 동일한 것으로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것은본절이 2-11절과 연결된 것이며 13절 이하의 '시험'(temptation)과는 차이가 있음을나타낸다(Ropes). 한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유대의 지혜서와묵시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시 1:1;32:1;잠 8:32,34;사56:2) 예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축복을 말하였다(마 5:3-11).따라서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법에 익숙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Burdick).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 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본절은 '호티'(* )로 시작하며 시험을 참는자에 대한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절이다. '인정하심을 받은'의 헬라어 '도키모스'(* )는 3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금이나 은을 제련하여 귀금속이나 동전으로서자격을 얻는 것'과 같은 인정함을 의미한다(롬 5: 4). 이것은 시험의 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순수함이 인정되면 '생명의면류관'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여기서 '면류관'(* ,스테파논)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으로 (고전 9:25;딤후 4:8)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끊임없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 지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Ropes, tasker).

=====1:13
사람이 시험을 받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 본절의 '시험' 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메노스'(* ,)는 앞서 언급한 '시험'(2,12절)이 의미하는 '시련'(trial,test) 아니라 '유혹'(temptation)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페이라조메노스'를 '하나님께'(* , 아포 데우, '하나님께로부터')받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매개(媒介)의 성격이 강한 '휘포'(* ,'...의하여')를 사용하지 않고 '근원'을 의미하는 '아포'(* ,'...로부터')를 사용하여 '페이라조메노스'가 발생하게 되는 진원지가 하나님이 아님을 강하게 강조하고있다(Robertson). 그 '유혹'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죄악의 기질과 욕심에 미혹되어 발생하는 것으로(14절)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이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시험을 창조하시거나 사람을 시험하지 아니하실 뿐더러 아무에게도 시험을받지 아니하신다. '시험을 받지 아니하시고'에 해당 하는 헬라어 '아페이라스토스'(* )는 부정 접두어 '아'(* )와 '시험하다'의 '페이라조'(* )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악에서부터 거리가 먼' 상태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Hort, Diodorus, Josephus),유혹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시사한다(Bu-rdick).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실 뿐만아니라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본절은 사람이유혹을 받는 근원을 설명하고 있다. '시험'(temptation)이 사람을 연단시키기 위해서주신 하나님 섭리라고 합리화 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이다. '미혹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레아조메노스'(* )는 원래 사냥이나 고기잡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 '미끼로 고기를 꿰어 내다', '올가미로 사냥하다'를 의미한다(Mayor). 사람들이 유혹을 받는 것은 마치물고기가 자기앞에 놓인 낚시 바늘에 물려 이리 저리로 이끌려 다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한편 '욕심'의 헬라어 '에피뒤미아스'(* )는 악한뜻에 대한열망이다(롬 7:17-23; 갈 5:16-21; 엡 2:3; 살전 4:5).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욕심이 행동으로 유발되지 않은 상태 즉 내적 상태로 머물러 있을때는 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야고보는 인간이 욕심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죄가 싹이트고 결국에는 사망에까지 이른다고 강조하고 있다. '잉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쉴라 부사'(* )는 문자적으로 '함께 붙잡다'라는 의미이나 여자의 임신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눅 1:24). 여기서는 죄의 단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욕심' 그 자체가 바로 죄이다. 혹자는 욕심을 자연적이고 오염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한다(Mayor). 그러나 인간의죄란 욕심에게 굴복당하는 시점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욕심이 순수하다고 주장하는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Calvin).욕심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필연적으로 죄를 유발하고 그 마음의 상태가 습관으로 굳어 져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창 3:19; 롬 5:12).'낳다'에 해당하는 두 단어 '틱테이'(* )와 '아포퀴에이'(* )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을 의미하나 전자는 문학적인 표현이고 후자는 의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Ropes). 또한 정상적으로나 비정상적으로나 출산하는 것 모두를 뜻하나 본문에서는 비정상적인 출산 즉 유산을 나타내는 말이다(Robertson).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영적 사망을 잉태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롬 6:23).

=====1:16
내 사랑하는 행제들아 속지 말라 - 본절은 애정이 깃들어있는 부드러운 권면이다.'속지 말라'(* ,메 플라나스데)는 심각한 말로 권면할 때 사용된 어법으로 (고전 15:33; 갈 6:7; 요일 3:7) '메'는 금지를 암시하는 완곡어법이다(Robertson).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받을 때에 그 시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런 착각은 스스로 미혹을 받아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므로 속지 말아야 한다.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 풍족하게 내려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5절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본절에서도 좋은 은사와 선물들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은사'(* ,도시스)와 '선물'(* ,도레마)은 동일하게 '주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디도미'(* )라는 동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문체론적 변화이다(Moo). '좋은 은사'는 일반 은총이 아닌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내리는 특별 은총을 의미하며(Manton) '온전한 선물'은 성도들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영화로운 상태에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위이다. 이러한 은사와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며 온전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혹에서 범죄치 않도록 도와준다(Burdick). 한편 '빛들의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빛의 왕으로 모든 빛들을 창조하시고 주관하고 계심을 시사한다(Manton, Martin). '빛들의'는 하늘의 빛나는 별을 가리키는 모든 하나님의 선물을 찬양하는 표현이다(Philo). 한편 본절은 특별히 6행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야고보가 다른 자료에서 인용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나(Mayor, Moo, Dibelius,Davids, Ropes). 본서의 문체나 운율적인 리듬의 형태를 볼 때 야고보의 독창적인 저술이라고 보는 것이 무방하다(Lenski, Martin, Mussner, Reicke, Schrage).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야고보는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할 때 여러 가지 형태의 변화된 빛으로 보여지는 하늘의 별들과 하나님을 비교하여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강조한다(Ropes).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들을 변함없이 내리시는 분이다. '변함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랄라게'(* )는 천문학 용어로서 별들이 시차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Manton). 한편 '회전하는 그림자'(* ,트로페스 아포스키아스마)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의 변화를 의미하는지,달의 그림자 즉 일식, 월식 등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지구의 회전으로 인한 태양빛의 변화로 생기는 사물의 그림자를 가리킨다(Ropes, RSV). 이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베푸시는 은사와 선물은 변함이 없음을 시사한다.

=====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 본절은 하나님이 시험을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마지막 이유이다(Burdick). '한 첫 열매'(* , 아파르켄 티나)는 구약성경에서 수확된 첫 곡물을 하나님께 드리는것을 나타낸다(출 34:22;레 23:10). 모든 곡식의 첫 소산물이 하나님께 바쳐지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선택되어서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첫 열매가 된다. 혹자는 야고보가 '우리'를 사용한 것이 보편적인 인류 전체를의미한다고 하나(Hort), 중생한 자들이나 당시 초대 교회의 성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Moo). 왜냐하면 야고보는 비교의 뜻이 담겨있는 '티나'(* )를사용하여 피조물과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Calvin).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 '뜻'에 해당하는 헬라어 '불레데이스'(* )는 피조물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하나님의선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로(엡 1:11;벧전 1:3)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다(엡 1:4,5).따라서 야고보가'불레데이스'를 사용한 의도는 택한 자녀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자기 공로나 외부적 환경의 영향으로 말미암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Manton, Calvin).한편 '진리의 말씀'이란 진리를 통하여 확증된 복음의 말씀이며(엡 1:13; 골 1:5; 딤후 2:15). '낳다'에 해당하는 '아페퀴에센'(* )은 자연적인 출생의 의미로 '창조하다'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행 17:28). 따라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라는 말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들 즉 첫 열매된 자들이 옛 성품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1:19
너희가 알거니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테'(* )는 명령법이라기보다는 직설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Robertson). 만약 야고보가 명령법의 의도로 사용했다면 4:4 처럼 '오이다'( * , '알다')의 명령형 '오이다테'(* )를 사용하였을 것이다.그러므로 '이스테'는 수신자들이 과거에 알고있는 거듭난 사실에 대한 인정이나 권고 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를 권면한다.
듣기는 속히 하고 - 거듭나는 것은 순간적인 현상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꾸준히 지속되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Ropes).
말하기는 더디하며 - 이것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하여 말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논쟁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온전히깨닫지 못하게 된다.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하기전에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Burdick,Tasker).
성내기도 더디 하라 - 본문은 일반적으로 분노, 증오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의 격분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의(義)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

=====1:20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앞절에서 행한 권면에 대한 근거임을 나타낸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 성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해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삶에 위배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위이다(Burdick,Tasker,Moo).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 야고보는 본문에서 다시그리스도인이 말씀을 받기에 합당한 조건을 언급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마땅히 해야 할일은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는 것이며,이미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어 버리고'의 '아포데메노이'(* )는 '옷을 벗어 버리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 세심하게 자신을 살펴 마음속에 있는 모든 탐욕과 정욕 등을 내어 버려야 함을 시사한다. 그렇지않고 부주의할 경우 쉽게 악에 빠지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파리안'(* )은 본래 '옷에 붙어 있는 더러운 때'를 의미하였으나 종종 '몸에 불결하게 생긴 상처' 등을말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모든 도덕적인 악을 가리키는 것으로(Manton, Martin)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뤼파리안'을 떨쳐버려야 함을 권면한다.'넘치는 악'(* ,페릿세이안 카키아스)에 '페릿세이안'은 '충분한','남은 것'을 뜻하는 단어로 흘러 넘치는 것을 가리키며 '카키아스'는 '악한'의 뜻보다는 '위선', '더러운 욕망'을 의미한다(Calvin, Lenski, Lightfoot). 이것은 앞서언급된 '뤼파리안'과 동의어로 중복된 표현을 통해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도덕적인 악을 버려야 함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Martin).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 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 본문은 구원의 수단으로 '마음에 심긴 도'를 말한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또한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책임감있게 말씀에 응답해야하며 그것을 실제로 행함으로 열매를 맺을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Burdick, Martin).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단지 듣기만을 좋아하는 자는 나태한 자이며 자신 속이는 자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될 것을권면한다. '행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타이'(* )는 '아사'(* , '행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윤리적 측면의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포이에타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생활로써 증거하는 자를 의미한다(롬 2:13,Calvin, Adamson).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도를 듣는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한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말씀을 들은 자는 그것을 행하여야할 책임이 있다.그러나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 참여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다(마7:21).

=====1: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 야고보는 본절에서 도를 듣고 행치 않는자를 거울을 보는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노운티'(* )는 경솔하게 힐끔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서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나타낸다(Burd-ick, Martin). 당시의 거울은 유리가 아닌 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나 희미한 모습으로 비춰질 뿐 확신이 없음을 나타낸다(Ad-amson). 이는 단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열심히 주의하여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행하지 않으면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음을 시사한다(Mayor).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곧 잊어버리거니와 - 본절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이마치 회미한 거울을 주의 깊게 살펴서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였지만 거울을 떠나면 자신의 모양을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기만 하는 것이 전부가아니고 행함이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이론적인 지식으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할수 없다. 말씀은 오직 듣고 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서 야고보는 '보고'(* , 카타노에센),'가서'(* ,아펠렐뤼덴),'잊어버리거니와'(* , 에펠라데토)의 단순 과거형을 사용하여서 진리의 말씀을 희미하게 듣고 나서 실행치 않는 자가 곧 말씀을 잊어 버리고 다시 죄의 상태로되돌아 가는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 - 본절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에 대한 설명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야고보와 수신자가 유대지향적인 배경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Burdick), 구약 시대의 율법과 대조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복음'을 의미한다(렘 31:33, Moo,Tasker).구약 시대의 율법이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강제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율법은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유로운 것이다(요 8:32; 고후 3:16). 이것은 제도를 통하여 법적 구속력을 지닌 모세의 율법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 확실하게 드러난 실체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율법의 특징은 첫째로 택하신 자들을 진리와 자유로 인도하는 것에 모순과 결합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한다. 두번째 특징은 자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구속력을 지녀서 억지로 지키게 하는 것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Burdick). 한편 '들여다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큅사스'(* )는 몸을 구부려서 보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것이 '대충 힐끔 보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나(Hort) 본문에서는 문맥상 '주의깊게 관찰하다'라는 의미로 해석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Tasker, Burdick, Martin).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듣고 잊어버리는 자'(* ,아크로아테스 에필레스모네스)는 히브리식 표현으로 글자대로는 '망각을 듣는 자'란 뜻이다. 야고보는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알라'(* , '그러나')를 사용하여 '실행하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여기서 '실행하는자'란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못해도 그 행할것을 위해 심사숙고하는 자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Manton). 한편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말을 '율법을 행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안된다. 만약 그렇게 해석할 경우 율법을 지키는 그 일로 인하여 만사가 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실행하는 자체에 의미를 두어서 행위 자체가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 신약성경에서 본문에만 나오는 '경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레스코스'(* )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다'에 해당하는'드레오마이'(* )에서 유래된 듯하다(Robertson). 이는 예배의 외적인모습 즉 기도, 구제, 금식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렇게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이 말에 대해서 자제하지 못할 때 자기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된다. '재갈 먹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리나고곤'(* )은 '재갈'을 의미하는 '칼리노스'(* )와 '이끌다'의뜻인 '아고'(* )의 합성어이다. 이는 재갈 먹이지 않는 말을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Lenski) 남을 비방하거나 악담하는 것을제어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혀를 절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며 이렇게 말과 행위가 틀린 경건은 위선자들에게서 오는 헛된 것이다(마 6:2,16).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이것이니라 - 본절은 경건의 정의라고는 할수 없지만 경건한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이라는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경건한 삶은 내적인 모습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외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헬라어 '파라토 데오'(* )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평가방법으로 사람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Lightfoot).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함은 경건의 구체적인 한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러움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미안토스'(* )는 '더럽히다'의 '미아이노'(* )와 부정 접두어 '아'(* )가 합성된 형용사로서 후에 의미가 변천되어 '정결한(* , 카다라)이란 의미로 사용 되었다(Robertson). 이로 보아 '정결하고더러움이 없는'이란 표현은 의미상 동의어 중복으로 강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고대에는 종교 예식에 있어서 기독교든 이교도든 정결하고 흠 없는 제사가 요구되었기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초대 기독교 사회에서 바리새인에 의해 지속되어졌었다(마23:25; 막 7:3, Ropes). 야고보는 본절에서 내적인 경건 생활에서 비롯되는 외적인 경건 생활의 모습에 대해서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 본문에서는 특별히 두 부류의 대상만을언급하고 있으나 그 외의 다른 부류인 나그네나 병든 자, 갇힌 자 등을 제외시키지는않는다. 이들은 한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마 25:40) 구제 대상들이다(Ropes). 한편 '돌아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케프테스다이'(* )는 문자적으로 '보러 가다', '조사하러 가다'를 의미하는것으로 단순히 교제를 나누기 위한 돌아봄보다는 극히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돌아보는것을 시사한다(갈 5:6, Burdick).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 야고보는 '세속'(* , 코스무)이라는 단어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통한 죄악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Le-nski, Burdick). 이는 사도 요한이 잘 쓰는 표현 방법으로(요일 2:16) 이웃 사랑은 물론 자신 스스로가 죄악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화를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을권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건한 자의 삶에 있어서 이웃 사랑과 자기의 거룩한 생활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Monday, January 18, 2010

히브리서 7장 16절 ~ 28절

=====7: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 본문은 11절의 부정적인 표현 곧'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와 동일한 의미로 11절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Lane).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은 포괄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뜻하는 것으로 레위 계통의 합법적인 후손, 혹은 어떤 신체적 자격 요건 등을 가리킨다(Michel).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율법에 나타난 바대로 레위 자손의 혈통이나 외적 조건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다.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 본문은 11절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과 연관된다. 저자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대조시켜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썩거나 죽을 수밖에 없는 제한된 육체의 계명 즉 율법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된 것임을 강조한다(시 110:4,Lane). 그리스도는 성경이 증거 하는대로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만세의 왕'으로서(딤전 1:17) 그의 제사장직은 영원한 생명를 부여하는 영원한 것이다.

=====7:17
증거 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 본절은 시110:4의 인용으로서 16절에서 저자가 말한 것 곧 그리스도가 무궁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이다. 저자가 본절에서 '증거 하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레이타이'(* )를 사용한 것은 저자 자신이 시 110:4을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Lane).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이 불완전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과 무관하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 직임을 나타내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전함을 암시한다.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 본절과 다음절은 저자가 11절부터 언급한 내용의 결론이다. '계명'은 문맥상 제사장직에 관련된 율법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느나(Lane), 1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세의 모든 율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orris). 한편 '연약하며'의 헬라어 '아스데네스'(* )는 율법자체가 연약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Lane). 또한 '무익하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펠레스'(* )는 율법이 단지 사람의 외형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 뿐 그 내적인 양심(良心)을 깨끗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음을 시사한다(9:9,10,14,23;10:14, Hewitt).

=====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 할지라 - '온전케'로 번역된 헬라어 '에델레이오센'은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는 온전한 관계를 의미한다(11절). 율법은 단지 외형적인 것만 깨끗하게 하고 내적인 양심은 깨끗게 할 수 없어서(9:9,14)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 즉 사람들은 제사장직이나 성결 의식과 같은 율법적인 제도에 의해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한 관계를 이룰 수 없었다(Riggenbach , Michel).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리라 - '더 좋은'(* ,크레이트토노스)이란 표현은 히브리서 저자의 독특한 표현이다(19, 22절;8:6;9:23). '더 좋은 소망' 즉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 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으며, 레위적인 율법 제도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Lane).

=====7:20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 본절과 다음절은 새로운 제사장이신 예수와 레위 계통의 제사장 사이의 비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엄숙하신 맹세로 말미암아 제사장으로 지목된 반면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맹세 없이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부여받았다(28절). '맹세없이 된 것이 아니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코리스 호르코모시아스'(* )는 시 110:4의 추론으로 하나님의 맹세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확고한 보증이 됨으로 신자들은 그의 제사장직에 소망의 닻을 드리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6:18-20,Schneider, Thompson).

=====7: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는 시110:4의 인용이다(17절).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심으로 부여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맹세하신 약속의 신실성으로 인해(Cockerill) 보증된 것이다. 반면에 율법 하에서 이루어진 레위인의 제사장직은 하나님의 맹세나 약속 혹은 보증이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다만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16절)을 좇아 이루어진 직분에 불과하다. 이러한 두 제사장직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보다 우월하며, 완전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언약에 대한 보증임을 암시한다(22절).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 저자는 '언약'의 헬라어 '디아데케스'(* )를 본서에서 17회나 사용하여 중시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처음 나타난다. '디아데케',는 '유언', '서약', '의지'라는 의미로 70인역(LXX)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은혜로운 '의지'를 가리킨다(Lane). 동시에 그 단어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가 함축되어 있다(Morris). 문맥상 본절의 언약은 제의적(祭儀的)인 것으로(Lane) 옛 언약 즉 구약의 제의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었으나 외형적인 것만 정결케 하고 내적인 양심은 정결케 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었다(18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시고(8:8-10;9:15-20), 새 언약을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온전히 나아올 수 있도록 하셨다(25절;9;14,15). 새 언약은 구약의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이다. 한편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에 대한 '보증'은 영원한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9절;13:20). '보증'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귀오스'(* )는 '보증인'이라는 의미로 이 보증인은 '중재자'의 뜻인 헬라어 '메시테스'(* )와는 달리(8:6;9:15;12:24)보증인 자신의 인격과 생명을 담보로 자신이 행한 말에 대해 보증한다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Michel).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담보로 구원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다.

=====7: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 저자는 새 언약의 제사장은 예수 한분뿐인 반면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그 수효가 많음에 주목한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아론부터 시작해서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에 이르기까지 83명의 대제사장들이 취임했었다고 한다(Antiq. 20,227).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수효가 많다는 것은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그들이 행하는 제의가 불완전함을 반영한다(1:1;10:1-4, Michel, Thompson).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을 인하여 제사장직을 감당할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였던 반면 예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므로 뒤를 이을 다른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뒤이을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 행하신 사역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아파라바톤'(* )은 70인역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로 제사장이 그의 의무를 계속한다는 의미이다(Josephus). 예수의 영원성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일시성과는 달리 그의 제사장직이 영구적임과 동시에 최종적(最終的)인 것임을 시사한다(Lane).

=====7:25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덴'(* )은 본절이 23,24절의 논리적 귀결임을 나타낸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 '온전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토 판텔레스'(* )는 '완전히','절대적으로'라는 의미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구원의 완전성을 뜻한다. 한편 '구원하실'의 헬라어 '소제인'(* )은 현재시상이다. 본서에 나타나는 '구원'이 미래에 있을 종말론적인 유업을 가리키는 반면(1:14;5:9;9:28) 본절의 '소제인'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 그리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현재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구원'을 시사한다(2:3,4;6:4,5,9, Lane). 그리스도는 옛 언약의 제의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새 언약인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에게 현재 구원에 참여케 하며 동시에 종말론적 구원에의 참여를 보증하신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간구하심이니라'의 헬라어 '엔튕카네인'(* )은 '중재하다'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하나님께 특별한 복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심을 가리킨다(Lane, Snell, Morris).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할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 '이러한 대제사장'이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원하시며(24절),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25절), 항상 살아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 중재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새 언약에 합당한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모든 길을 마련해 놓으신 분이다. 저자는 영원한 구원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신 대제사장 그리스도에 대해 다섯 가지로 묘사한다. 이 다섯 가지는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지녀야 할 성품과 지위를 나타낸다(Hauck).
거룩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시오스'(* )는 70인역에서 '충실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12: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서 보여준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나타낸다(5:7,8).
악이 없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카코스'(* )는 '교활하지 않은','순수한'이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순수하셨으며 어떠한 악과도 접촉하지 않으셨음을 시사한다(Moffatt, Grundmann, Bruce).
더러움이 없고 - 이의 헬라어 '아마안토스'(* )는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이라는 뜻으로 제의적 순결성을 나타낸다(마카비 2서 15:34).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제의 의식을 통해서 외적으로 더럽혀진 자신을 깨끗이 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더럽혀지지 않은 온전한 도덕적 순결성을 소유하셨다(Morris).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 이것은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성품과 연결된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도덕적으로 죄인들과 분리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죄인인인류와는 다른 존재이시다(Buchanan, Peterson).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 '하늘보다 높이'의 헬라어 '휩셀로테로스 톤 우라논'(* )은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Lane). 예수께서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과는 달리 승천하셔서(4:14)곧바로 하나님존전에 나아가신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중재자가 되신다(Morris).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속죄일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항상 자기 죄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린다(5:3;레 4;3-12;16:6-10). 왜냐하면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도 역시 불안전한 인간으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번자신과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렸으나 저자는 본절에서 '날마다'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 자신도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드리는 것으로
표현한 이유는(9:7,25;10;1) 대제사장이 제사를 매일 드렸다는 의미보다는 그가 부주의로 죄를 범했을 때 매일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Bruce).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므로 자신의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4:15)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리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드린 한 번의 제사는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친 완전한 제사였기 때문이다.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 저자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을 그의 대제사장직의 핵심적인 기능으로 제시한다.(Zimmermann). 죄 없으신 완전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완전한 자신을 제물로 드린 그의 속죄사역은 일시적인 레위 계통 제사장들의 속제 사역과는 달리 한 번으로 영구화(永久化) 될 수 있었다. 저자는 본절을 통해서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의 불완전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설명하고 있다.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 저자는 본장을 결론지으면서 사람인 제사장과 온전하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와 세 가지 차이점을 제시한다. (1) 율법과 맹세의 말씀. 옛 언약에 속한 레위 제사장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물려받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셔서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맹세의 약속을 성취하였으며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 (2) 사람과 아들. 옛 언약의 제사장들은 유한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반복적이고 일시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살아계셔서 온전한 중재 사역을 행하셨다. (3) 약점을 가진 자와 온전케 되신 자. 옛언약의 제사장은 약점을 가져서 불완전한 사역을 행할 수 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하셔서 지상 생활의 고난 가운데서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믿는 사람의구원의 근거가 되셨다(2:10;5:8,9)

Saturday, January 16, 2010

히브리서 6장 1절~8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저자는 5:11-14에서 언급한 신앙상의 권면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을 계속 권고한다. 그는 본절에서 더 이상 독자들을 젖을 먹는 어린아이(5:13)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Lane).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본절 하반절과 2절에 세개의 쌍으로 된 6가지 항목으로 상술되고 있다. 본서의 수신자들이 유대인 공동체였기에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유대교 관습과 연관된 것이었다(Bruce, Morris, Lane).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죽은 행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생명을 주지 못하는 구약 시대 율법의 제사 의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9:10, Hewitt). (2)혹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의 실제적인 모든 악행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나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타당하다(Morris). 또한 죽을 수밖에 없던 지난날의 행실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인 '회개'는 세례 요한이나(마3:2), 예수 그리스도(막1:15) 그리고 그의 제자들(행2:38)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이상의 것으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을 시사한다(Morris). 이러한 믿음은 참된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창15:6;합2:4).

=====6:2
세례들과 안수와 - '세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스몬'(* )은 기독교의 '세례'(* , 밥티스마)를 의미하지 않고(롬6:4;엡4:5;골2:12) 유대교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을 의미한다(레11-15장, Bruce, Morris).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죄 씻음을 받은 표징(表徵)을 세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으며(요3:25;행19:1-5) 처음 믿는 개종자들은 이'세례들'에 관한 교훈에 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안수'는 구약시대부터 널리 시행되던 관습이었다(민8:10;신34:9).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개종자(행8:17)나 전도사역자(딤전4:14)에게 종종 안수를 시행하기도 하였다(행8:17-19). 본 절의 '안수'는 주로 개종자들에게 행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 이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관한 마지막 세번째 쌍으로서 미래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중대 관심사인 종말론적 교리이다(사26:19;단7:9,10;12:2;눅20:37,38;행23:8;마카비2서 7장,Bruce). 이러한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존재로서 마지막 때에 회계해야 함을 시사한다.
완전한 데 나아갈 지니라 - '완전'의 헬라어 '텔레이오테타'(* )는 '성숙'이라는 의미로 공동체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Lane).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개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그러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권한에 순종하기를 권면한다.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의 헬라어'에안페르 에피트레페 호 데오스'(* )에서 '...하시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안페르'는 '페르'(* , '참으로')를 접미어로 취한 형태로 '참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조건 문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한편 '이것'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ffatt, Hewitt). (2)혹자는 '완전한 데 나아가는 것'(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obertson, Morris, Bruce, Lan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것은 이미 버리라고 저자가 권면했기 때문이다(1절). 그리스도인들이 완전 곧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1,7절, Lane).

=====6:4
한번 비췸을 얻고 - 저자는 4-8절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헛된 교훈에 미혹된 배도자(背道者)의 결말에 대해 경고한다. 본절과 다음절은 개종자들의 첫 신앙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그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해석하기에 다소 난점이 있다. '비췸을 얻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티스덴타스'(* )는 '비추다'라는 의미의 동사 '포티조'(* )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2세기경에는 '세례를 베풀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포티스덴타스'가 '개종자들이 세례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Kasemann,Conzelmann, Bruce). 그러나 이러한 용례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단어가 세례 베푸는 것을 뜻한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도리어 '포티스덴타스'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으며(요1:9;고후4:4,6;벧후1:19)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빛'(마5:14;요8:12)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성찬'(聖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왜냐하면 '맛보고'의 헬라어 '규사메누스'(* )가 문자적으로 '음식을 맛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혹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Lane). 그러나 본절의 '하나님의 은사'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렵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Morris).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 '참예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토쿠스'(* )는'참여하다', '교제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을 가리킨다(Lane, Bruce).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인 듯하다(Morris, Hewitt). 한편 '내세의 능력'은 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Lane, Morris). 이와같이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이다.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 '타락한 자들'의 헬라어'파라페손타스'(* )는 '한쪽으로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의 동사'파라피프토 '(* )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파라페손타스'는 4,5절에서 언급한 영적 체험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사를 체험하였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를 가리킨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본 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1)본 절은 다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든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가 뜻하는 바는 '다시 회개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회개하는 자가 자신의 삶 전체의 방향을 전환시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코 반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것이다. 따라서 본 절은 타락한 자들이 일회적인 회개를 다시 반복할 수없음을 시사한다(Morris). (2)저자는 구약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알고 지은 고의적으로 배도한 본절의 '타락한 자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자임을 의미한다(Bruc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우룬타스'(* )에서'다시'로 번역된 접두사 '아나'(* )는 '다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에'라는 의미이다(Robertson, Hewitt, Morris). 이것은 타락한 자들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았다 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십자가 위에 못박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시사한다.

=====6:7
개역 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절과 다음절이 앞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받고 -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로 사5:1 이하의'포도원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유사하다(Bruce). '땅'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이며(마13:18-23)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이다(사44:3;55:10). 밭을 가는 자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을 때 밭이 그에 맞는 소출을 내면 밭을 가는 농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아니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Hewitt, Morris, Lane).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 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 본 절은 배교자에 대한 비유이다. '가시와 엉겅퀴'는 창 3:17, 18의 내용과 연관된다.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산물이었다. 본 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배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그것의 '마지막' 즉 결과는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다. '불사름'의 헬라어 '카우신'(* )은 마지막 심판 때의 엄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도구가 된다(10:27;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