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anuary 20, 2010

야고보 1장 6절 ~ 27절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 응답받는 기도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믿음'은 '지혜'를 구하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을 확신하고 신뢰하는 것이다(마 21:21;막 11:23). 따라서 성도들은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 행위가 있어야한다(Ropes). 한편 '의심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디아크리노메스'(* )는 '디아'(* ,'사이에')와 '크리노'(* , '분리시키다')의합성어로서 어떤 문제에 대해 양쪽에서 저울질하는 것을 나타낸다(Calvin). 따라서 이말은 심리적으로 두 마음을 품은 분리된 상태 즉 마음 속에서 의심하는 것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다(행 10:20).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 '이런 사람' 은 기도할 때 의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므로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에 대한 부정성보다는 사람이 기도할 때 자기 판단에 맡겨 버리는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에게 의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의심을 극복하고 이겨낼 때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 , 퀴리우)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때 그 기도를 듣고 계셔서, 의심치 않고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시련을 당할 때 인내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이다.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두 마음'(* ,디프쉬코스)은 본서에만 나오는 말이다(4:8).'디프쉬코스'는 신약성경 이전에 전혀 사용된 문헌이 없고 신약성경 이후의 교부시대에 자주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Clement ofRome, Hermas) 아마 야고보가 만들어 낸 단어일 것으로 추측된다(Gibson).이 말은 '정함이 없는'(* , 아카타스타토스)과 평행을 이루는 말로서 두 가지의 방법이나 생각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마음이 항상 불안정하여 변하기 쉬우므로 하나님을 떠나기 쉬운 자들이다.

=====1:9
개역성경에는 '데'(* ,'그러나')가 생략 되어있다. 이 '데'는 9-11절의 내용이2-5절의 시험과 연결된 것임을 나타낸다(Burdick,Martin).왜냐하면 12절에서 다시 '시험'에 대해 언급되기 때문이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 '낮은'에 해당하는 '호 타페이노스'(* )가 신분적인 것인지 아니면 물질적 또는 육체적인 것인지는명백하지 않으나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가리켰으며(시 72:4;잠 30:14, Robertson) 10절의 '부한 형제'(* , 호 플루시오스) 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본절의 '호 타페이노스'는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이렇게 비천에 처한 자들이 자랑해야 할 것은 '높음'이라 했다. 여기서 '높음'이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피조물의 가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승귀를 나타낸다(요15:15; 계 3:21).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비천한 자리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인내함으로 보다 더 영예로운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 지니 - '낮은 형제'와 마찬가지로 부자들도취해야 할 마음이 있다.그것은 자신들이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뽐내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한 자'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자신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ibelius, Blackman).그 이유는 본문상 9절에는 '형제'라는 말이 있지만 본절에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서 '형제'를 생략한 것은 9절에서 사용한 것이므로 본절에서는 반복을 피하여 생략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Burdick, Martin). 따라서 본문의 '부한 자'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물질적으로 부요하거나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은 자를 가리킨다(Marton, Adamson, Cantinat, Mayor, Ro-pes, Mussner). 일반적으로 부자인 형제들은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인하여 영적인 교만함까지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부한 형제들은 지상에서 소유한 부가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일시적인 것임을 깨달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것처럼(빌 2:8) 낮은 자와 동일시하며 부를 자랑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한다(Moo, Tasker).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 본절은 부한 형제들이 낮아짐을 자랑해야 할이유이다. 아무리 부요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부요함을 영원히 누리지는 못한다. 마치꽃이 시드는 것처럼 부(富)뿐만 아니라 생명도 곧 시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시 102:11; 사 40:6,7; 고전 7:31; 벧전 1:24).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 야고보는 사 40:7을 인용하여 부한자의 부를 덧없는 풀의 꽃에 비유하여부한 형제들이 낮아져야 함을 권면한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는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뜨거운 바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소니'(* ) 란 말은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 오는 '시로코' 라는 뜨거운 남동풍으로이 바람이 불어 오면 곧장 채소 따위의 식물이 말라죽곤 하였다(욥 1:19;눅 12:55).이처럼 부자의 입는 옷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오는 안락은 쉽게 시들어 버린다. 그러기에 부한자는 일시적인 부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낮아져야 한다.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 '쇠잔하다'의 헬라어 '마란데세타이'(* )는 '불을 끄다'라는 의미를 지닌 '마라이노'(* )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지상에서의 부와 영화가 영원하지 않으며 사라지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Ropes)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종말의 때에 부로 인하여마음이 교만해 있던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 행한 일로 인하여 심판을 받고역시 그것들과 함께 사라질 것을 시사한다(Martin). 따라서 본문을 해석할때 '부와 함께'를 포함하여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Erasmus, Calvin).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시험'에 해당하는 혤라어 '페이라스몬(* )은 2절에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이스'(* ,'시험')와 동일한 것으로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것은본절이 2-11절과 연결된 것이며 13절 이하의 '시험'(temptation)과는 차이가 있음을나타낸다(Ropes). 한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유대의 지혜서와묵시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시 1:1;32:1;잠 8:32,34;사56:2) 예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축복을 말하였다(마 5:3-11).따라서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법에 익숙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Burdick).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 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본절은 '호티'(* )로 시작하며 시험을 참는자에 대한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절이다. '인정하심을 받은'의 헬라어 '도키모스'(* )는 3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금이나 은을 제련하여 귀금속이나 동전으로서자격을 얻는 것'과 같은 인정함을 의미한다(롬 5: 4). 이것은 시험의 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순수함이 인정되면 '생명의면류관'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여기서 '면류관'(* ,스테파논)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으로 (고전 9:25;딤후 4:8)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끊임없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 지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Ropes, tasker).

=====1:13
사람이 시험을 받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 본절의 '시험' 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메노스'(* ,)는 앞서 언급한 '시험'(2,12절)이 의미하는 '시련'(trial,test) 아니라 '유혹'(temptation)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페이라조메노스'를 '하나님께'(* , 아포 데우, '하나님께로부터')받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매개(媒介)의 성격이 강한 '휘포'(* ,'...의하여')를 사용하지 않고 '근원'을 의미하는 '아포'(* ,'...로부터')를 사용하여 '페이라조메노스'가 발생하게 되는 진원지가 하나님이 아님을 강하게 강조하고있다(Robertson). 그 '유혹'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죄악의 기질과 욕심에 미혹되어 발생하는 것으로(14절)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이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시험을 창조하시거나 사람을 시험하지 아니하실 뿐더러 아무에게도 시험을받지 아니하신다. '시험을 받지 아니하시고'에 해당 하는 헬라어 '아페이라스토스'(* )는 부정 접두어 '아'(* )와 '시험하다'의 '페이라조'(* )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악에서부터 거리가 먼' 상태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Hort, Diodorus, Josephus),유혹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시사한다(Bu-rdick).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실 뿐만아니라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본절은 사람이유혹을 받는 근원을 설명하고 있다. '시험'(temptation)이 사람을 연단시키기 위해서주신 하나님 섭리라고 합리화 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이다. '미혹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레아조메노스'(* )는 원래 사냥이나 고기잡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 '미끼로 고기를 꿰어 내다', '올가미로 사냥하다'를 의미한다(Mayor). 사람들이 유혹을 받는 것은 마치물고기가 자기앞에 놓인 낚시 바늘에 물려 이리 저리로 이끌려 다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한편 '욕심'의 헬라어 '에피뒤미아스'(* )는 악한뜻에 대한열망이다(롬 7:17-23; 갈 5:16-21; 엡 2:3; 살전 4:5).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욕심이 행동으로 유발되지 않은 상태 즉 내적 상태로 머물러 있을때는 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야고보는 인간이 욕심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죄가 싹이트고 결국에는 사망에까지 이른다고 강조하고 있다. '잉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쉴라 부사'(* )는 문자적으로 '함께 붙잡다'라는 의미이나 여자의 임신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눅 1:24). 여기서는 죄의 단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욕심' 그 자체가 바로 죄이다. 혹자는 욕심을 자연적이고 오염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한다(Mayor). 그러나 인간의죄란 욕심에게 굴복당하는 시점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욕심이 순수하다고 주장하는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Calvin).욕심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필연적으로 죄를 유발하고 그 마음의 상태가 습관으로 굳어 져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창 3:19; 롬 5:12).'낳다'에 해당하는 두 단어 '틱테이'(* )와 '아포퀴에이'(* )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을 의미하나 전자는 문학적인 표현이고 후자는 의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Ropes). 또한 정상적으로나 비정상적으로나 출산하는 것 모두를 뜻하나 본문에서는 비정상적인 출산 즉 유산을 나타내는 말이다(Robertson).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영적 사망을 잉태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롬 6:23).

=====1:16
내 사랑하는 행제들아 속지 말라 - 본절은 애정이 깃들어있는 부드러운 권면이다.'속지 말라'(* ,메 플라나스데)는 심각한 말로 권면할 때 사용된 어법으로 (고전 15:33; 갈 6:7; 요일 3:7) '메'는 금지를 암시하는 완곡어법이다(Robertson).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받을 때에 그 시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런 착각은 스스로 미혹을 받아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므로 속지 말아야 한다.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 풍족하게 내려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5절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본절에서도 좋은 은사와 선물들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은사'(* ,도시스)와 '선물'(* ,도레마)은 동일하게 '주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디도미'(* )라는 동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문체론적 변화이다(Moo). '좋은 은사'는 일반 은총이 아닌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내리는 특별 은총을 의미하며(Manton) '온전한 선물'은 성도들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영화로운 상태에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위이다. 이러한 은사와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며 온전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혹에서 범죄치 않도록 도와준다(Burdick). 한편 '빛들의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빛의 왕으로 모든 빛들을 창조하시고 주관하고 계심을 시사한다(Manton, Martin). '빛들의'는 하늘의 빛나는 별을 가리키는 모든 하나님의 선물을 찬양하는 표현이다(Philo). 한편 본절은 특별히 6행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야고보가 다른 자료에서 인용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나(Mayor, Moo, Dibelius,Davids, Ropes). 본서의 문체나 운율적인 리듬의 형태를 볼 때 야고보의 독창적인 저술이라고 보는 것이 무방하다(Lenski, Martin, Mussner, Reicke, Schrage).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야고보는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할 때 여러 가지 형태의 변화된 빛으로 보여지는 하늘의 별들과 하나님을 비교하여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강조한다(Ropes).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들을 변함없이 내리시는 분이다. '변함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랄라게'(* )는 천문학 용어로서 별들이 시차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Manton). 한편 '회전하는 그림자'(* ,트로페스 아포스키아스마)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의 변화를 의미하는지,달의 그림자 즉 일식, 월식 등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지구의 회전으로 인한 태양빛의 변화로 생기는 사물의 그림자를 가리킨다(Ropes, RSV). 이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베푸시는 은사와 선물은 변함이 없음을 시사한다.

=====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 본절은 하나님이 시험을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마지막 이유이다(Burdick). '한 첫 열매'(* , 아파르켄 티나)는 구약성경에서 수확된 첫 곡물을 하나님께 드리는것을 나타낸다(출 34:22;레 23:10). 모든 곡식의 첫 소산물이 하나님께 바쳐지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선택되어서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첫 열매가 된다. 혹자는 야고보가 '우리'를 사용한 것이 보편적인 인류 전체를의미한다고 하나(Hort), 중생한 자들이나 당시 초대 교회의 성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Moo). 왜냐하면 야고보는 비교의 뜻이 담겨있는 '티나'(* )를사용하여 피조물과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Calvin).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 '뜻'에 해당하는 헬라어 '불레데이스'(* )는 피조물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하나님의선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로(엡 1:11;벧전 1:3)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다(엡 1:4,5).따라서 야고보가'불레데이스'를 사용한 의도는 택한 자녀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자기 공로나 외부적 환경의 영향으로 말미암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Manton, Calvin).한편 '진리의 말씀'이란 진리를 통하여 확증된 복음의 말씀이며(엡 1:13; 골 1:5; 딤후 2:15). '낳다'에 해당하는 '아페퀴에센'(* )은 자연적인 출생의 의미로 '창조하다'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행 17:28). 따라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라는 말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들 즉 첫 열매된 자들이 옛 성품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1:19
너희가 알거니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테'(* )는 명령법이라기보다는 직설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Robertson). 만약 야고보가 명령법의 의도로 사용했다면 4:4 처럼 '오이다'( * , '알다')의 명령형 '오이다테'(* )를 사용하였을 것이다.그러므로 '이스테'는 수신자들이 과거에 알고있는 거듭난 사실에 대한 인정이나 권고 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를 권면한다.
듣기는 속히 하고 - 거듭나는 것은 순간적인 현상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꾸준히 지속되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Ropes).
말하기는 더디하며 - 이것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하여 말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논쟁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온전히깨닫지 못하게 된다.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하기전에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Burdick,Tasker).
성내기도 더디 하라 - 본문은 일반적으로 분노, 증오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의 격분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의(義)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

=====1:20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앞절에서 행한 권면에 대한 근거임을 나타낸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 성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해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삶에 위배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위이다(Burdick,Tasker,Moo).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 야고보는 본문에서 다시그리스도인이 말씀을 받기에 합당한 조건을 언급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마땅히 해야 할일은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는 것이며,이미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어 버리고'의 '아포데메노이'(* )는 '옷을 벗어 버리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 세심하게 자신을 살펴 마음속에 있는 모든 탐욕과 정욕 등을 내어 버려야 함을 시사한다. 그렇지않고 부주의할 경우 쉽게 악에 빠지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파리안'(* )은 본래 '옷에 붙어 있는 더러운 때'를 의미하였으나 종종 '몸에 불결하게 생긴 상처' 등을말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모든 도덕적인 악을 가리키는 것으로(Manton, Martin)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뤼파리안'을 떨쳐버려야 함을 권면한다.'넘치는 악'(* ,페릿세이안 카키아스)에 '페릿세이안'은 '충분한','남은 것'을 뜻하는 단어로 흘러 넘치는 것을 가리키며 '카키아스'는 '악한'의 뜻보다는 '위선', '더러운 욕망'을 의미한다(Calvin, Lenski, Lightfoot). 이것은 앞서언급된 '뤼파리안'과 동의어로 중복된 표현을 통해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도덕적인 악을 버려야 함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Martin).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 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 본문은 구원의 수단으로 '마음에 심긴 도'를 말한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또한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책임감있게 말씀에 응답해야하며 그것을 실제로 행함으로 열매를 맺을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Burdick, Martin).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단지 듣기만을 좋아하는 자는 나태한 자이며 자신 속이는 자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될 것을권면한다. '행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타이'(* )는 '아사'(* , '행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윤리적 측면의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포이에타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생활로써 증거하는 자를 의미한다(롬 2:13,Calvin, Adamson).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도를 듣는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한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말씀을 들은 자는 그것을 행하여야할 책임이 있다.그러나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 참여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다(마7:21).

=====1: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 야고보는 본절에서 도를 듣고 행치 않는자를 거울을 보는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노운티'(* )는 경솔하게 힐끔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서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나타낸다(Burd-ick, Martin). 당시의 거울은 유리가 아닌 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나 희미한 모습으로 비춰질 뿐 확신이 없음을 나타낸다(Ad-amson). 이는 단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열심히 주의하여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행하지 않으면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음을 시사한다(Mayor).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곧 잊어버리거니와 - 본절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이마치 회미한 거울을 주의 깊게 살펴서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였지만 거울을 떠나면 자신의 모양을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기만 하는 것이 전부가아니고 행함이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이론적인 지식으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할수 없다. 말씀은 오직 듣고 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서 야고보는 '보고'(* , 카타노에센),'가서'(* ,아펠렐뤼덴),'잊어버리거니와'(* , 에펠라데토)의 단순 과거형을 사용하여서 진리의 말씀을 희미하게 듣고 나서 실행치 않는 자가 곧 말씀을 잊어 버리고 다시 죄의 상태로되돌아 가는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 - 본절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에 대한 설명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야고보와 수신자가 유대지향적인 배경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Burdick), 구약 시대의 율법과 대조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복음'을 의미한다(렘 31:33, Moo,Tasker).구약 시대의 율법이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강제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율법은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유로운 것이다(요 8:32; 고후 3:16). 이것은 제도를 통하여 법적 구속력을 지닌 모세의 율법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 확실하게 드러난 실체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율법의 특징은 첫째로 택하신 자들을 진리와 자유로 인도하는 것에 모순과 결합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한다. 두번째 특징은 자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구속력을 지녀서 억지로 지키게 하는 것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Burdick). 한편 '들여다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큅사스'(* )는 몸을 구부려서 보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것이 '대충 힐끔 보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나(Hort) 본문에서는 문맥상 '주의깊게 관찰하다'라는 의미로 해석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Tasker, Burdick, Martin).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듣고 잊어버리는 자'(* ,아크로아테스 에필레스모네스)는 히브리식 표현으로 글자대로는 '망각을 듣는 자'란 뜻이다. 야고보는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알라'(* , '그러나')를 사용하여 '실행하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여기서 '실행하는자'란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못해도 그 행할것을 위해 심사숙고하는 자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Manton). 한편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말을 '율법을 행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안된다. 만약 그렇게 해석할 경우 율법을 지키는 그 일로 인하여 만사가 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실행하는 자체에 의미를 두어서 행위 자체가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 신약성경에서 본문에만 나오는 '경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레스코스'(* )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다'에 해당하는'드레오마이'(* )에서 유래된 듯하다(Robertson). 이는 예배의 외적인모습 즉 기도, 구제, 금식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렇게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이 말에 대해서 자제하지 못할 때 자기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된다. '재갈 먹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리나고곤'(* )은 '재갈'을 의미하는 '칼리노스'(* )와 '이끌다'의뜻인 '아고'(* )의 합성어이다. 이는 재갈 먹이지 않는 말을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Lenski) 남을 비방하거나 악담하는 것을제어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혀를 절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며 이렇게 말과 행위가 틀린 경건은 위선자들에게서 오는 헛된 것이다(마 6:2,16).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이것이니라 - 본절은 경건의 정의라고는 할수 없지만 경건한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이라는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경건한 삶은 내적인 모습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외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헬라어 '파라토 데오'(* )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평가방법으로 사람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Lightfoot).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함은 경건의 구체적인 한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러움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미안토스'(* )는 '더럽히다'의 '미아이노'(* )와 부정 접두어 '아'(* )가 합성된 형용사로서 후에 의미가 변천되어 '정결한(* , 카다라)이란 의미로 사용 되었다(Robertson). 이로 보아 '정결하고더러움이 없는'이란 표현은 의미상 동의어 중복으로 강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고대에는 종교 예식에 있어서 기독교든 이교도든 정결하고 흠 없는 제사가 요구되었기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초대 기독교 사회에서 바리새인에 의해 지속되어졌었다(마23:25; 막 7:3, Ropes). 야고보는 본절에서 내적인 경건 생활에서 비롯되는 외적인 경건 생활의 모습에 대해서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 본문에서는 특별히 두 부류의 대상만을언급하고 있으나 그 외의 다른 부류인 나그네나 병든 자, 갇힌 자 등을 제외시키지는않는다. 이들은 한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마 25:40) 구제 대상들이다(Ropes). 한편 '돌아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케프테스다이'(* )는 문자적으로 '보러 가다', '조사하러 가다'를 의미하는것으로 단순히 교제를 나누기 위한 돌아봄보다는 극히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돌아보는것을 시사한다(갈 5:6, Burdick).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 야고보는 '세속'(* , 코스무)이라는 단어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통한 죄악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Le-nski, Burdick). 이는 사도 요한이 잘 쓰는 표현 방법으로(요일 2:16) 이웃 사랑은 물론 자신 스스로가 죄악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화를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을권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건한 자의 삶에 있어서 이웃 사랑과 자기의 거룩한 생활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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