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25, 2010

로마서 7장 7절 ~ 25절( 마음의 법 육신의 법)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 이 표현은 '그런즉 어찌하리요'(6:15)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앞에서 설명한 바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하든지 아니면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면서 또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한 바울의 상투적인 문장 전개 방법이다(3:1;4:1, 10;6:1;8:31;9:14, 30;10:8).
율법이 죄냐 - 바울이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했으므로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율법이 죄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사실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한 것은 율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사람이 육신의 지배를 받을 때는 율법이 도리어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 이 말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는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 죄는 율법 때문에 생성되는 것도 아니며 율법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다(Calvin). 다만 율법은 그 죄를 죄로 규정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율법으로 말미암지'란 말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는 데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 바울은 율법 중 탐심(貪心)을 경계하는 구절을 대표적으로 언급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탐심은 인간의 심성 속에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실제적인 범법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로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의 심성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악한 동기도 죄라고 가르쳐 줌으로써 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인간 사회에서는 '탐심'으로는 죄가 성립되는게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악한 동기조차 죄로 규정된다(마 5:27, 28;6:1-4, 18). (2)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으로 표현될 수 있듯이 타락한 인간의 죄는 탐욕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또한 우상 숭배와 같다(골 3:5). 바울이 '탐욕'을 우상 숭배와 같이 취급한 이유는 둘다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7:8
죄가 기회를 타서 - 본문은 '죄'(* , 하마르티아)가 주체로서, 인격성(人格性)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기회를'(* , 아포르멘) 엿보다가 '취한다'(* , 라부사)는 의미이다. 이처럼 죄가 인격성을 가지고 능동적인 활동을 한다는 표현은 죄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그 유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해리슨(Harrison)의 말대로 본절 배후에 유혹과 타락에 관한 창세기 기사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죄'가 인격성을 가진 주체로 표현되는 것은 사단의 교활한 특성을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틈만 보이면 달려드는 맹수 같은 성격을 가진 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탐심이 속에서 잠재해 있다가 계명으로 인해서 드러난다'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이미 7절 하반절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이 백지와 같음을 전제하고 죄가 계명을 통해 탐심을 유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인간 내부에 있는 탐심이 죄의 요구를 따라 계명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온갖 탐심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처럼 끝없이 유발되는 죄로 인하여 인간은 도무지 살길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 본 구절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는 말씀과 의미상 같다. 왜냐하면 '죄가 죽었다'(* , 네크라)는 것은 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이 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Calvin). 아무튼 본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죄 자체는 항상 활동하고 있으나 인간 편에서 법이 없을 때는 그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율법의 죄를 밝히 드러나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 본장에서 강조되고 있다.

=====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이라도 바울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율법의 각 조문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않게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10:3)사람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바울은 율법에 대한 지식은 있었으나 깨달음이 없었던 것이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 '계명이 이르매'란 표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명을 깨닫게 되매'라는 말로 의역이 가능하다. 그리고 '살아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제센'(* )은 '아나자오'(* )의 부정과거 동사로 본래 '다시 살아나다', '희생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단순히 '활동하게 되다'라는 의미이다(Hendriksen). 죄가 본래부터 있었으나 사람이 계명에 대해 깨닫기 시작하면 죄가 자기 속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죄의 요구도 함께 커지므로, 죄에 대한 자신감보다는 죄를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된다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과 복의 근원'이었다(신 5:31-33).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어 있었다(겔 20:11).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범죄할 기회를 주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의 길에서 인간의 생명을 지도하고 규정하여 생명을 보존하자는데 있다(Murray). 그리고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달은 시 119편의 저자는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 119:14)고 고백했다. 따라서 바울이 지금까지 부정적으로 언급해온 율법은 그 진정한 정신이 망각된 형식적인 유대인의 율법이기도 하며 또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으로써 그 기능을 다하는 의미에서의 그 율법이다(갈 3:23-25).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 인간은 어느 누구도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 없으므로, 그 계명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여기에는 바울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으나, 그것은 그에게 생명에 대한 희망보다 오히려 비참한 절망감과 정죄(定罪)만 주었다. 이러한 체험은 종교 개혁자 루터(Luther)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믿음에 대한 눈을 뜨기 전에는 형식적인 교리와 규정들이 그를 짓누르며 생명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는 사망의 상태가 그를 괴롭힐 뿐이었다. 본절의 '되었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데'(* )는 '발견하다'는 뜻의 동사 '휴리스코'(* )의 단순 과거 수동태 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이후에 비로소 율법과 계명이 자신을 정죄하며 그 자체 안에서는 죽음밖에 없음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7:11
표현 방법상 본절은 8절과 같지만 내용면에서는 서로 다르다. 8절은 죄를 드러나게 하는 계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본절은 계명을 통해서 죄가 사람에게 철저한 좌절감을 맛보게 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를 속이고 -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던 바울은 이제 계명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이전과 같이 자신이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마땅히 계명을 지킬 수 있어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바울은 죄가 계명을 통해서 자기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속임수는 죄가 계명을 통해서 바울로 하여금 죄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네가 그래도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 ?'고 정죄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와 같은 속임당함에 의한 심한 좌절과 고민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속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세파테센'(* )이 '여사파타오'(* )의 단순 과거 능동태 형으로서 '완전히 길을 잃게 만들었다'(mislead)는 점에서 분명하다.
나를 죽였는지라 - 이 표현은 9절 하반절의 '나는 죽었도다'란 고백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Murray). 혹자는 바울이 죄로 인한 '사망의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율법을 추종하던 때의 일이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구절들에 의해 결코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갈등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7:12
이로 보건대 - 계명 자체가 사람에게서 죄를 유발(誘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가 계명을 도구로 하여 사람을 속이고 정죄하는 이 모든 사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본다는 의미에서 바울은 본절의 접속사(* , 호스테)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율법도 거룩하며...의로우며 선하도다 - 이 선언은 직접적으로 7절의 '율법이 죄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만, 문자적으로는 율법과 계명이 지닌 속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투영(投影)되어 있으므로 그 자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할 수밖에 없다.

=====7:13
본절에서 바울은 계명이 선하다는 사실을 변증하면서, 그 선한 계명과 죄 그리고 성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요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계명은 성도들 가운데 있는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한다. 이때 성도는 심한 죄의식을 느끼게 되며 선을 행하여 거룩하게 되고자 했던 소망이 좌절되어 심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계명은 성도로 하여금 스스로 의롭게 되며 선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허무하게 만든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된 성도가 그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계명이 성도의 삶을 좌절시킨다 하더라도 계명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계명이 성도를 허무와 좌절에 빠지게 한다면 폐기(廢棄)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율법 폐기론 내지는 율법 무용론을 염두에 두고 이에 대하여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메 게노이토)고 분명히 잘라 말하고 있다.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은 율법의 기원이 하나님께로서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Black). 실제로 '신령한'(* , 프뉴마티코스)이란 형용사는 신약성경에서 세상적이고 육적인(* , 사르키노스) 것과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전 2:13, 15;3:1;10:3, 4;12:1;15:44;엡 5:19;골 1:9;벧전 2:5). 그러나 율법이 비록 신적인 기원을 가진 신령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닌 약점(弱點)은 아무것도 온전케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히 7:19).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율법이 신령한 것이었던 점과 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육신에 속한(* , 사르키노스) 자라고 고백한다. '육신에 속한 자'란 죄에 대해 저항력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바울이 6장에서 이미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율법과 관련해서 볼 때, 성도는 항상 육신에 속한 자이며 죄인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성도는 육신에 속한자요 죄 아래 팔린 자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 혹자는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Thomas). 그렇다면 본절이 바울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난 고백이 아니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러나 바울은 이신 칭의(3:21-4:25)와 그것에서 비롯된 하나님과의 화해(5:1-21)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함께 거룩(성화)의 성취(6:1-23)에 대해서 논리를 전개해 왔고, 본장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에 걸맞는 삶을 살아보려고 시도했으나 다시 율법의 굉장한 벽에 부딪힌 체험을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겪는 신앙의 갈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말은 '죄에서 해방되었다'(6:18, 22)는 말과 대조적인 표현이다. 성도는 이 두 가지 신분을 동시에 지니고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면 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행하는 것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울 자신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뜻하는 바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도의 신앙적인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회의가 찾아들게 되는 시점이 바로 이때이다.

=====7:16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 바울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율법에 따라 의롭고 정당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는 그 원하는 바가 나오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바가 나타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해 내기 위해 바울은 앞에서 했던 말을 다시 조건문 형식으로 반복한다. 동시에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가 제시하게 될 해결책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있다.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 율법은 인간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지켜질 수 없다. 율법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죄 아래 매인 자신의 모습만 발견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의 의지로 도달될 수 없는 지고선(Summum Bonum)이다. 율법은 바울이 원치 않는 바를 행할 때마다 그 자신을 정죄한다. 이때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7:17
이제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뉘니데'(* , '그러면 이제는')는 3:21의 '이제는'과 같지만 본절에서는 어떤 주제의 전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면' 또는 '그런즉'을 의미하는 '운'(* )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Barmby). 따라서 15절과 16절에 이어지는 논리의 진전이 본절에서 제시되는데, 15절에서는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한다는 것을, 16절에서는 이처럼 원치 않는 것을 행할지라도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서술하고 나서 본절에서는 더욱 분석적이고 세밀하게 이 사실을 말하고자 '그러면 이제는'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바울은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죄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비록 죄가 자기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다. 즉 바울은 죄가 기회를 탈 수 있는 불의의 병기로 자기 몸을 죄에게 드렸던 점에 있어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리고 본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려는 자아와 그 자아를 이기고 나타나는 죄를 구분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록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어도, 자신의 실체는 이미 의롭다 인정받은 의인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죄를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다.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 성도의 신분은 영에 속한 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죄를 대항하기에 무기력한 '육신'(* , 사릍스)을 가지고 있는 신분이다. 이 육신이 있는 한 죄는 항상 기회를 타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 이러한 체험은 바울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누구든지 이러한 현실을 인정치 않는 자는 외식자가 되든지 완전주의자가 될 것이다. 외식자는 자신의 잘못을 항상 합리화시키기에 바쁠 것이며 완전주의(Perfectionism)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서 평생 갈등과 고민 가운데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마음은 선한 것을 행하려고 결심하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마음의 원하는 바를 실천할 수 없다(마 26:41). 이러한 사실은 인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부패의 뿌리가 얼마나 큰 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비록 거듭나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결심하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을 장악하여 성도로 하여금 선한 일을 위해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성도는 이 사실을 깨닫고 무력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쓰면 쓸수록 철저한 패배로 인한 비참함만 맛볼 뿐이다(24절).

=====7:19
본절은 15-18절까지의 진술을 요약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까지의 진술을 요약 반복함으로써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이 분명히 어떤 사실에 대한 것이었는지 보여 줌과 동시에 지금까지 고백한 신앙적인 딜레마(dilemma)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 갈 준비를 하고 있다.

=====7:20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본구절은 17절의 반복이다. 그러나 바울이 유도해 내는 내용은 서로 다르다. 본절에서는 상반절에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이라는 조건절이 언급된 다음 본구절이 곧바로 언급된 반면, 17절에서는 본절 상반절과 똑같은 조건절이 16절 상반절에 언급되고 그 다음 17절에서 본구절과 같은 말이 진술되기 전 16절 하반절에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본 구절에서 언급된 말이 16절과 17절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과 연관지어져 있으나 본절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세력에 대한 진술과 연관되어 있기(21-23절)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17절에서 언급했던 말을 본절에서 다시 반복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겪어야 하는 심각한 신앙적 현실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한편 본절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죄를 짓는 우리의 현실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극복되어야 할 신앙적 현실이라는 차원에서 본구절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를 우리의 죄를 합리화시키는 진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7:21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 일반적으로 바울은 '법'이란 단어를 율법에 대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그 뜻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혹자는 이 '법'을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세가지 법, 곧 하나님의 법(22절), 마음의 법(23절), 죄의 법(23절)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그리고 혹자는 이 '법'이 '하나님의 법'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urray). 또한 이 주장을 뒷받침 하는 해석을 유도하기 위해 '법'이란 단어 앞에 수단을 가리키는 전치사를 써서 '법에 의해서'라는 의미로 의역하는 학자도 있다(Erasmus). 그러나 머레이(Murray)의 주장은 큰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22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의 법과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닌 마음의 법만 강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대조되고 있는 '죄의 법'도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법'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우리 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립의 원리를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지배 원리'(governing principle) 또는 단순히 '원리' 정도로 해석하는 데(Harrison, Black), 이것은 본절에 사용된 '법'의 의미에 접근을 했으나 그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19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신의 모순된 행위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그러한 모순된 행위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 이유는 자신 속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바울은 악을 외부적인 어떤 요인이 아니라 사람 내부에 존재하는 실체(實體)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악은 인간 내부에서 잠잠히 있지 않고 항상 인간의 모든 지체를 지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Hendriksen).

=====7:22
내 속 사람으로는 - 혹자는 23절과 25절에서 대조되고 있는 마음과 육신이 몸과 영 또는 정신과 물질 간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구별이 아니라 윤리적인 구별이라고 주장한다(Murray). 이와 반대로 혹자는 고후 4:16을 근거로 하여 속 사람을 썩어질 겉 사람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Black). 더 나아가 혹자는 속 사람을 인간의 실질적인 자아로서 영(spirit)과 혼(soul)과 같은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겉 사람을 사람의 몸과 그 지체로 이해한다(Lenski). 여기서 후자의 주장들은 바울의 전체 사상 중에서 인간 이해 부분에 대해서는 만족시켜 줄 수 있으나 본절 이하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속 사람이 23절과 25절의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구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의 실체를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윤리적인 면에서 속 사람을 단순히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아로 규정하고 악을 행하는 다른 자아와 구분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노모 투 데우'( )가 '율법'을 의미하는지 8:2의 언급과 같은 '성령의 법'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율법'으로 이해한다(Hendriksen, Murray, Harrison, Lenski). 그렇지만 '하나님의 법'이 '성령의 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율법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지금 바울이 진술하고자 하는 것은 속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나 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거룩한 원리를 따르기를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이 '율법'이나 '계명'을 포괄하는 '거룩한 원리'로 해석되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즐거워하되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도마이'( )는 일차적으로 '...와 함께 즐거워하다'로 직역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치사 '쉰'( , '함께')과 결합된 합성 동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렌스키는 '...와 교제 하거나 교제하게 되어 즐거워한다'는 해석을 제안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함께'라는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없으므로 단순히 '...을 즐거워하다'(delight in, KJV, NIV, RSV). '...을 기뻐하다'(rejoice in;Scott, Robertson)라고 해석하는 것이 낫다. 또한 이 동사가 1인칭 단수를 나타내므로 '내가...을 즐거워하되'라고 이해해야 한다.

=====7:23
내 지체 속에서 - '지체'(肢體)는 '육신'과 동일한 의미다. 이 지체는 단순히 몸의 각 부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대항하기에 전혀 무기력하며 죄로 인해 사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의 몸'의 각 부분을 가리킨다. 비록 '지체' 그 자체는 '육신'과 마찬가지로 악한 것이 아니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의 지체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지체'는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는 것이다(6:13). 그러나 우리의 지체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데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에라야 의의 병기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 '마음의 법'은 22절의 '하나님의 법'에 상응하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법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선한 의지를 일으키며 '한 다른 법'인 '죄의 법'과 투쟁 관계에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법'은 마음자체에서 일어나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의지를 선한 양심 안에서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이다. 한편 바울은 '한 다른 법'과 '마음의 법'이 투쟁 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싸워'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즉 성도안에는 이 두가지 법이 서로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투쟁하고 있으므로 성도는 자신도 모른 사이에 갈등 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성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이 당연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이러한 언급을 성도들에게 하지 않았다면, 성도들은 이 두 법의 갈등으로 인한 신앙적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 '하나님의 법'이나 '마음의 법'이 단순히 율법이나 계명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죄의 법' 역시 어떤 명문화된 법을 의미하지 않고 죄가 역사하는 원리 또는 죄의 세력을 지칭한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워 마땅히 하나님의 법이 이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이기고 성도를 죄의 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성도가 현재의 삶 가운데서 겪게 되는 실상이다. 바울이 성도가 겪게 되는 신앙적인 현실에 대해 이토록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1) 성도 자신이 현실에서 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며 (2) 이러한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지닌 넓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3) 그런데 여기에는 성도 자신의 실존이 변화되어 있는 상태로 있기 때문에, 죄의 법이 심각한 도전을 해도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비참한 현실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고 선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보는 도다'라는 표현은 경험적으로 '알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시각적인 경험으로 표현하여 성도가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강조한다.

=====7:24
스토트(J. Stott)는 본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불신자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특정지워지면 본절과 같이 자신을 '비참한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한다. 성숙되지 못한 성도는 '자기 확신'(self-confidence)으로 특정지워지며 자기를 구원할 자에게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성숙된 성도만이 '자기 혐오'(self-disgust)와 '자기 절망'(self-despair)의 상태에 이르게 되며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조금도 거하지 않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이 사람은 자기의 곤고함을 알아 믿음으로 구원을 위해 호소한다." 이와 같이 스토트는 본절을 거듭나지 못한 자의 탄식이 아니라 거듭났으며 성숙된 성도의 탄식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구원을 위한 호소'는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호소(Murray)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간의 갈등을 극복케 해달라는 호소이다. 불신자 또는 거듭나지 못한 자는 자기속에 일어나는 두 법의 투쟁을 깨닫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 탄식하지 않는다.
곤고한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탈라이포로스'(* )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비슷하게 '심한 고난을 겪는 사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여 '비참한 사람'(wretched man, KJV, NIV, RSV)으로 번역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혹자는 바울이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한 것은 절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고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Lenski). 그러나 이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지금 바울의 탄식은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항상 실패한 자신의 형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전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절망감과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통'이나 '고민' 정도로 '탈라이포로스'를 해석하게 된다면 탄식하는 바울의 심정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사망의 몸 - 숙명적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세력을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의 몸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망'은 '죄의 결과'로 초래되는 것이므로(6:23) 죄의 세력을 의미한다.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바울은 24절의 탄식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본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즉 바울은 그토록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속을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3:21-6:23이 교리적 차원에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준다면 본절은 교리를 현실적인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자신이 겪은 갈등을 통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앞에서 계속 진술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지만, 본절은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같은 표현이 앞에서는(20-23절) 탄식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본절은 진정한 해방의 선포를 위한 내용이다. 즉 이는 탄식이면서도 몸의 구속 곧 진정한 구원을 기다릴 준비를 갖게 하는 내용인 것이다(8:23). 이처럼 본 구절은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을 비참한 현실적 삶을 통해 여과(濾過)시켜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진 보다 깊은 비밀로 이끌어 가도록 전환시키는 분수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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