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15, 2010

히브리서 13장 8절~17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 하시니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 혹자는 본문이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죽고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이 없으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예수께서 '어제'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계심을 나타낸다. (2) 혹자는 본절이 7절과 9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어제' 과거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전파하였으며 '오늘' 수신자 공동체가 '어제' 전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한 가르침과(9절) 바꾸려고 하는 상태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구속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 )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 자들은 이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된 예법에 불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 뿐 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 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 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 혹자는 '제단'의 헬라어 '뒤시아스테리온'(* )이 문자적인 희생 제단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Hewitt) 그것은'희생 제사'에 대한 환유(換喩)로(Bruce, Lane)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Spicq, Montefiore,W. Manson, Andriessen).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Bruce).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이나 그에 따른 급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Kuss).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며 온전케 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를 문자적으로 신약 시대의 성만찬과 연결지어 제단을 성만찬 식탁으로 해석한다(Schroger).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 절 내에 성만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때 타당하지 않다.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한편 '영문 밖에서'라 함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한다. 구약의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시하는 제단에서 먹을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구약의 제의에 따라 사는 자들은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된 속죄 사역의 결과인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Lane).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영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11절) 성문 밖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Lane).(1) 성문 밖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으로(J. Jeremias).예수의 고난이 대제사장적인 속죄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임을 시사한다(10:12). (2)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께서 정죄 받으심은 물론 백성들에 의해 배척(排斥) 당하심과 급기야 처형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거룩케 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세'(* )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제시하지 못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13:13
그런즉 우리는...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영문 밖'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그것이 지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Thompson). (2) 혹자는 그것이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Morris, Bruce, Hughes, Westcott, Filson).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거룩한 영역에서 제외 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Bruce).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 능욕을 지고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 곧 십자가상의 죽음은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신 21:22,23; 갈 3:13,Hewitt, Morris).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수치와 치욕으로 이해된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는 복음서의 저자와도 동일하다(마10:37,38; 막 8:34-38).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13:15,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예수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아우투'(* )는 문자적으로 '그로말미암아'라는 의미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되었음을 시사한다(Hewitt). 한편 '항상'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 본문은 호 14:2(LXX)의 인용으로 '찬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셈어 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다(Lane, Morris, Bruce).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의 헬라어 '유포이이아스'(* )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스'(* )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는 관용(寬容)을 가리킨다(Morris, Lane, J.Y.Campbell).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한다(Thuren).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위를 동반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 마음로 열납 하신다(Lane).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 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 위험과 이해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2:1-4; 3:7-12; 5:11-6:12; 10:23-29; 12:12-17,25-29, Hewitt,Lane, Riggenbach).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 본문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것은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이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아그뤼프누신 '(* )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목자 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Spicq, Bruce, Morris).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10:39, Morris,Bruce, Michel) 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는 지도자들의 책임을 나타낸다. 참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책임 이행에 대한 답을 요구하실 때 응답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 교사들과 같이 이상한 다른 가르침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을 돌보고 양육한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도자들을 섬기고 순종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Bruce, Hewitt, Mo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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