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16, 2010

히브리서 6장 1절~8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저자는 5:11-14에서 언급한 신앙상의 권면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을 계속 권고한다. 그는 본절에서 더 이상 독자들을 젖을 먹는 어린아이(5:13)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Lane).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본절 하반절과 2절에 세개의 쌍으로 된 6가지 항목으로 상술되고 있다. 본서의 수신자들이 유대인 공동체였기에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유대교 관습과 연관된 것이었다(Bruce, Morris, Lane).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죽은 행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생명을 주지 못하는 구약 시대 율법의 제사 의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9:10, Hewitt). (2)혹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의 실제적인 모든 악행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나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타당하다(Morris). 또한 죽을 수밖에 없던 지난날의 행실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인 '회개'는 세례 요한이나(마3:2), 예수 그리스도(막1:15) 그리고 그의 제자들(행2:38)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이상의 것으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을 시사한다(Morris). 이러한 믿음은 참된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창15:6;합2:4).

=====6:2
세례들과 안수와 - '세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스몬'(* )은 기독교의 '세례'(* , 밥티스마)를 의미하지 않고(롬6:4;엡4:5;골2:12) 유대교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을 의미한다(레11-15장, Bruce, Morris).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죄 씻음을 받은 표징(表徵)을 세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으며(요3:25;행19:1-5) 처음 믿는 개종자들은 이'세례들'에 관한 교훈에 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안수'는 구약시대부터 널리 시행되던 관습이었다(민8:10;신34:9).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개종자(행8:17)나 전도사역자(딤전4:14)에게 종종 안수를 시행하기도 하였다(행8:17-19). 본 절의 '안수'는 주로 개종자들에게 행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 이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관한 마지막 세번째 쌍으로서 미래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중대 관심사인 종말론적 교리이다(사26:19;단7:9,10;12:2;눅20:37,38;행23:8;마카비2서 7장,Bruce). 이러한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존재로서 마지막 때에 회계해야 함을 시사한다.
완전한 데 나아갈 지니라 - '완전'의 헬라어 '텔레이오테타'(* )는 '성숙'이라는 의미로 공동체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Lane).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개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그러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권한에 순종하기를 권면한다.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의 헬라어'에안페르 에피트레페 호 데오스'(* )에서 '...하시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안페르'는 '페르'(* , '참으로')를 접미어로 취한 형태로 '참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조건 문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한편 '이것'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ffatt, Hewitt). (2)혹자는 '완전한 데 나아가는 것'(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obertson, Morris, Bruce, Lan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것은 이미 버리라고 저자가 권면했기 때문이다(1절). 그리스도인들이 완전 곧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1,7절, Lane).

=====6:4
한번 비췸을 얻고 - 저자는 4-8절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헛된 교훈에 미혹된 배도자(背道者)의 결말에 대해 경고한다. 본절과 다음절은 개종자들의 첫 신앙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그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해석하기에 다소 난점이 있다. '비췸을 얻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티스덴타스'(* )는 '비추다'라는 의미의 동사 '포티조'(* )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2세기경에는 '세례를 베풀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포티스덴타스'가 '개종자들이 세례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Kasemann,Conzelmann, Bruce). 그러나 이러한 용례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단어가 세례 베푸는 것을 뜻한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도리어 '포티스덴타스'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으며(요1:9;고후4:4,6;벧후1:19)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빛'(마5:14;요8:12)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성찬'(聖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왜냐하면 '맛보고'의 헬라어 '규사메누스'(* )가 문자적으로 '음식을 맛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혹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Lane). 그러나 본절의 '하나님의 은사'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렵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Morris).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 '참예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토쿠스'(* )는'참여하다', '교제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을 가리킨다(Lane, Bruce).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인 듯하다(Morris, Hewitt). 한편 '내세의 능력'은 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Lane, Morris). 이와같이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이다.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 '타락한 자들'의 헬라어'파라페손타스'(* )는 '한쪽으로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의 동사'파라피프토 '(* )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파라페손타스'는 4,5절에서 언급한 영적 체험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사를 체험하였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를 가리킨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본 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1)본 절은 다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든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가 뜻하는 바는 '다시 회개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회개하는 자가 자신의 삶 전체의 방향을 전환시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코 반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것이다. 따라서 본 절은 타락한 자들이 일회적인 회개를 다시 반복할 수없음을 시사한다(Morris). (2)저자는 구약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알고 지은 고의적으로 배도한 본절의 '타락한 자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자임을 의미한다(Bruc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우룬타스'(* )에서'다시'로 번역된 접두사 '아나'(* )는 '다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에'라는 의미이다(Robertson, Hewitt, Morris). 이것은 타락한 자들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았다 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십자가 위에 못박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시사한다.

=====6:7
개역 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절과 다음절이 앞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받고 -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로 사5:1 이하의'포도원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유사하다(Bruce). '땅'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이며(마13:18-23)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이다(사44:3;55:10). 밭을 가는 자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을 때 밭이 그에 맞는 소출을 내면 밭을 가는 농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아니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Hewitt, Morris, Lane).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 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 본 절은 배교자에 대한 비유이다. '가시와 엉겅퀴'는 창 3:17, 18의 내용과 연관된다.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산물이었다. 본 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배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그것의 '마지막' 즉 결과는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다. '불사름'의 헬라어 '카우신'(* )은 마지막 심판 때의 엄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도구가 된다(10:27;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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